길티 플레저, 킥보드의 유혹

입력
2020.10.09 22:00
23면
서울 종로구 경복궁 인근 도로에서 한 남성이 전동 킥보드를 타고 지나가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서울 종로구 경복궁 인근 도로에서 한 남성이 전동 킥보드를 타고 지나가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집을 일터에 가까운 곳으로 옮긴 지 2주가 지났다. 흔히 말하는 '직주근접'의 편리함을 온몸으로 체감하는 중이다. 도보로 15분 거리에 잍터가 있으니, 집에 뭘 두고 와도 금세 다녀올 수 있고, 수리공 아저씨와 시간을 맞추는 일도 여유롭다. 교통비가 크게 줄어든 것은 물론이고, 저녁을 가급적 집에서 먹겠다는 의지가 생겨 외식비도 줄었다.

가장 긍정적인 변화는 차를 몰고 출근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주차로 인해 골치아픈 일들을 겪지 않게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직주근접'은 충분히 가치있는 선택이 되었다.

또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변화는 택시 탈 일이 크게 줄어든 것이다. 올빼미형 근무자라 야근이 잦은데 하던 일을 중간에 끊지 않아도, 막차 놓쳐 거액의 심야 택시비를 내지 않아도 집에 편히 갈 수 있게 됐다. 언제나 시끌시끌한 홍대 거리를, 침묵이 내려앉은 시간에 걸어 퇴근하는건 매우 신선한 경험이다.

그러다 '길티 플레저'가 생겼다. '킥보드'를 타게 된 것이다! 와,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손잡이를 꼭 잡고 발을 몇 번 구르면 시속 20㎞가 넘는 속도로 거리를 활주할 수 있다. 자전거처럼 근육을 쓰거나 땀을 흘릴 필요도 없다. 전방만 주시하고 교통법규만 제대로 지킨다면, 일상에서 이만큼 상쾌한 경험을 할 일이 어디 있을까 싶을 만큼 기분이 맑아진다. 공유 킥보드 업체가 늘어 아무데서나 타고 아무데서나 내릴 수 있어 편리한 것도 장점이다. 요즘처럼 화창한 날, 발구름 몇 번에 바람을 가르며 시내를 누비는 행위는 그 자체로 스트레스 해독제가 된다.

하지만 좋은 점만 있을 리 없다. '길티 플레저'라 쓴 이유도 여기서 비롯된다. 사실, 나는 여왕님이 내린 킥보드 타기 금지령을 위반하는 중이다. 지난해 킥보드를 타다 두 번이나 넘어진 적이 있어 '절대 킥보드 타지 말 것' 명령을 하달받았다. 두 번의 낙상으로 킥보드의 위험성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그 즉시 '금킥' 모드에 돌입했다. 하지만 사무실에서 지하철 한 정거장 거리, 그것도 하필(!) 킥보드 수 십 대가 주차된 구역 앞으로 이사를 오게 된 뒤 그 유혹에 다시 넘어가고 만 것이다.

킥보드가 위험한 것은 근본적으로 통제가 어려운 탈 것이어서다. 내가 처음 킥보드를 타다 넘어진 건 작년 5월 프랑스 파리 출장 때였다. 자전거 도로가 비교적 잘 되어 있어 서울보다 훨씬 쉬운 코스였지만, 갑자기 출몰한 행인을 피하기란 어려웠다. 작년 가을, 홍대 거리에서 불현듯 튀어나온 차량을 피하다 넘어졌을 때도 그랬다. 다행히(?) 무릎이 깨진 것에 그쳤지만, 대부분 아무런 보호장비 없이 탑승하기 때문에 작은 사고도 치명적일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킥보드 이용 인구가 급속하게 늘어나고 있다. 그러니 자연히 지금 우리의 도로들이 가진 한계에 눈이 간다. 자전거 도로가 불법 주차 공간으로 전용된 지 오래다. 도시에서 자전거를 타는 건 꽤 높은 위험에 스스로를 노출하는 일이었다. 여기에 킥보드가 추가됐다. 대부분 평상복으로 이용하며, 이동 중 선 채로 탑승하는 시속 20㎞ 이상의 탈 것이다. 치명률을 낮추고, 친환경 탈 것으로서의 가치를 폭넓게 공유하려면 전용 도로 강화 등 관련 규정의 정비를 서두를 필요가 있다. 그때가 되면, 나의 '길티 플레저'도 누구에게나 추천할 수 있는 '저스트 플레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서형욱 풋볼리스트 대표ㆍ축구해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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