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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작가들의 작고 평범한 이야기, 그 안의 슬픔

입력
2020.10.09 04:30
15면

<33> 나쓰메 소세키 외 '슬픈인간'

편집자주

어쩐지 펼쳐 보기 두려운 고전을 다시 조근조근 얘기해 봅니다. 작가들이 첫손에 꼽는 산문가, 박연준 시인이 '한국일보' 에 4주 금요일마다 글을 씁니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나쓰메 소세키. 봄날의 책 제공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나쓰메 소세키. 봄날의 책 제공


인간은 슬픔을 손에 쥐고 태어난다. 아기가 태어나 처음 내보이는 감정 표현도 ‘울음’이다. 기쁨을 모르는 자는 있어도, 슬픔을 모르는 자는 없다. '슬픈 인간'이란 책 제목은 그래서 편안하다. 받아들이기 쉽고, 눈길을 머물게 하는 제목이다. 이 책에는 근현대 일본작가 스물여섯 명이 쓴 마흔한 편의 산문이 묶여있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다자이 오사무, 나쓰메 소세키처럼 유명 작가들부터 요사노 아키코, 오카모토 가노코 같은 생소한 작가들의 작품까지 두루 실렸다. 근현대 일본 작가들의 수필을 읽을 기회가 드물었기에, 20세기 초중반을 살던 그들의 일상이 담긴 산문모음선을 읽을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오다 사쿠노스케. 봄날의책 제공

오다 사쿠노스케. 봄날의책 제공


오사카 암시장을 묘사한 오다 사쿠노스케의 글은 유머와 재치가 있다. 능청으로 시작해 먹먹함으로 끝나는 글의 플롯 또한 맵시 있다. 그는 암시장의 어수선한 분위기에 투덜거리다가도 “두 마리에 5엔” 하는 반딧불 앞에 서서 “잊혀가는 아름다움”을 생각한다. 두 마리에 5엔 하는 반딧불이라니! 그 옛날 어둑한 구석에 서서 작은 불빛을 사고 파는 사람들을 떠올리면 아득해진다.


다자이 오사무, 봄날의 책 제공

다자이 오사무, 봄날의 책 제공


'가을’이란 소재로 공책에 적어둔 문장을 소개하는 다자이 오사무의 글도 맛있다.

"가을은 여름이 타고 남은 것.” “여름은 샹들리에, 가을은 등롱” “코스모스, 무참” “창밖에 검은 흙 사이로 바스락바스락 기어가는 못생긴 가을나비를 본다.”(181쪽)

못생긴 가을나비라니, 촉각으로 스며드는 가을을 느낄 수 있게 하는 문장 아닌가.

이 책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글은 오카모토 가노코의 ‘복숭아가 있는 풍경’이다. 소녀 시절, 풋사랑에 빠져 마음에 울증이 생긴 그를 보고 어머니는 이렇게 말한다.

"찹쌀을 구워서 뜨거운 미숫가루에 넣어줄 테니 먹어보렴. 분명 네 맘에 들러붙은 기분이 풀어질 거야.”

"말린 서향 꽃을 목욕물 안에 넣어줄게. 좋은 향기가 마음을 편하게 해줄 테니까.” (238쪽)


오카모토 가노코. 봄날의 책 제공

오카모토 가노코. 봄날의 책 제공


그의 성정과 품위가 느껴지는 처방 아닌가. 어머니가 지닌 품위에는 소량의 달콤함이 녹아있어, 그 말에 귀를 기울이고 기대고 싶게 만든다. 작가는 “어머니가 후각을 중심으로 한 미각과 촉각을 통해 울증의 헐떡임을 다스렸다”고 한다. 마음의 뒤척임을 몸의 감각을 다스려 달래보려는 어머니의 생각, 가만한 속삭임에서 격조를 느낀다. 허나 달뜬 소녀의 울증은 쉬이 가라앉지 않는다.

"남성용 박쥐우산을 꺼내주세요.”

"조리를 꺼내주세요”

"강 건너 복숭아를 보러 갈 거예요.”

세 줄에 걸쳐 쓰인 위의 대사는 한 줄 한 줄이 꼭 징검다리 같아서, 소녀와 함께 강 건너 복숭아나무를 보러 갈 채비를 하게 만들고, 달뜨게 만든다. 다음은 어떻게 될까. 책을 읽어보시라. 복숭아 향기 같은 관능이 글의 전반을 휘감고 있지만, 넘침도 경박도 없다.


슬픈 인간ㆍ나쓰메 소세키 외 25인ㆍ정수윤 엮고 옮김ㆍ봄날의책 발행ㆍ344쪽ㆍ1만6,000원

슬픈 인간ㆍ나쓰메 소세키 외 25인ㆍ정수윤 엮고 옮김ㆍ봄날의책 발행ㆍ344쪽ㆍ1만6,000원


책을 번역한 정수윤은 날마다 도쿄의 국립도서관에 나가 “바다에서 흑진주조개를 캐듯” 근현대 작가의 산문을 읽고 골라냈다고 한다. 그 정성 때문일까. 어느 페이지를 펼쳐도 누추한 글이 없다.

"인간의 마음을 흡사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선득할 정도로 섬세하고 정교하게 묘사한, 그래서 읽는 사람의 몸 안쪽 어딘가에 예리한 흔적을 남기며 각인되는 이 기분, 저만 느끼는 감상일까요?” (역자 후기, 341쪽)

이 책엔 거대한 이야기가 없다. 작고 평범하고 오래된 이야기들 뿐이다. 다락방에 앉아 오래된 상자를 열어볼 때, 뜻밖에 마주치게 되는 것들. 울고 웃다 이게 소중한 것임을 깨닫게 되는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다.

박연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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