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주내 임신중지 허용, 낙태죄 존치와 다름 없어"

입력
2020.09.29 04:30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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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제 폐지 앞장선 여성원로 100인 "낙태죄 폐지" 성명
노혜경 시인 "낙태죄는 취약 여성 직접 타격" 주장
"종교계 입장은 결국 여성의 생명권을 위협하는 것"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 관계자들이 28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열린 '낙태죄' 완전 폐지 촉구 기자회견에서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 관계자들이 28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열린 '낙태죄' 완전 폐지 촉구 기자회견에서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임신중지(낙태) 결정을 여성의 자유의사에 맡겨두고 의료진을 처벌하지 않으면 아이를 낳을지 여부를 훨씬 빨리 결정할 수 있어요. 지금은 처벌이 두려워 낭비하는 시간이 생각보다 길어요. 낙태죄를 전면 폐지하면 낙태가 급증한다거나 후기 낙태가 늘어날 것이라는 주장은 근거가 빈약합니다.”

지난해 4월 11일 헌법재판소의 형법상 낙태죄에 대한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 대안입법을 마련해야 하는 시한이 채 100일도 남지 않았다. 28일 ‘안전하고 합법적인 임신중지를 위한 국제 행동의 날’을 맞아 2005년 호주제 폐지 운동에 적극 참여했던 여성계 원로 100명은 공동선언문을 내고 ‘여성의 결정을 신뢰하는 바탕 위에서만 변화가 가능하다’며 형법 제27장 ‘낙태의 죄’는 반드시 삭제돼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선언문에 함께 이름을 올린 시인 노혜경(62ㆍ전 청와대 국정홍보비서관)씨는 이날 한국일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호주제보다 낙태죄는 취약계층 여성들에게 직접적인 타격을 준다는 점에서 훨씬 절실한 사안”이라고 말했다.


노혜경 시인. 본인 제공

노혜경 시인. 본인 제공


노씨는 “돌봄이 부재한 여성 청소년이 방치된 상태에서 성매매의 길로 빠지게 됐을 때, 피임과 출산에 대한 지식 없이 아이를 가진 채 임신 사실도 모르고 시간을 보내버리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임신중지를 선택하는 가장 큰 이유는 비혼 상태에서 여성이 아이를 낳는 순간 일상을 영위할 수 없고 당장 사회 밑바닥으로 굴러 떨어져 아기와 함께 생존의 위기를 맞을 수 있다고 판단해서입니다. 국가는 안심하고 여성이 아이를 낳을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는 대신 임신중지만 단속하려고 듭니다."

현재 낙태죄 폐지를 둘러싼 가장 치열한 쟁점은 임신 주수(週數) 제한 여부다. 노씨는 “정부는 임신 14주 이내에는 임부 요청에 의한 임신중지 허용, 22주 이내는 사회경제적 이유가 있을 경우 임신중지 허용, 22주 이상은 기존대로 임신중지 금지로 초안을 잡은 것으로 알고 있다”며 “이러한 주수 제한은 사실상 낙태죄 존치와 다름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14주’라는 주수 제한의 기준이 불명확하다고 지적했다. “여성이 임신 여부를 명확히 파악하는 때는 보통 마지막 생리일 이후 10주 뒤입니다. 생리를 한 두 번 건너 뛰어 임신 테스트기를 사용했더니 두 줄(임신)이 나타나 고민 끝에 병원을 찾아가면 12, 13주는 금세 지나가죠. 14주 이내 임신중지를 결정하고 시행해야 한다는 건 비현실적입니다.” 사회경제적 이유도 마찬가지다. 그는 “임신중지 사유를 국가가 판단한다는 건 바뀌지 않는다. 개인과 국가의 '임신을 중지해야 할 사회경제적 이유'는 다를 수 있다”고 말했다.

종교계는 ‘여성의 행복추구권이 태아의 생명권에 앞설 수 없다’며 낙태죄 폐지를 반대하지만 여성의 삶을 고려하지 않은 기계적인 입장이라는 게 노씨를 포함한 여성계의 주장이다. “낙태죄 때문에 감당할 수 없는 아이를 혼자 양육하는 여성은 실제 생명권을 위협받는 게 아닌가요. 낙태죄 논의에서 당사자인 남성의 책임은 빠져있어요. 결국 낙태죄는 여성만 잠재적인 범죄자로 옭아매는 법일 뿐이기에 반드시 폐지돼야 합니다."

박소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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