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그 어느 때보다 몸의 건강과 마음의 힐링이 중요해진 지금, 모두가 좀 더 행복해지기 위한, 넓은 의미의 치유를 도울 수 있는 이야기들을, 자연과 과학, 기술 안에서 찾고자 합니다.
세상은 전체로 다가오지만, 나는 일부만을 인지할 수 있기에, 선을 긋는다. 모든 것을 주어도 일부만을 받아들이는 내 감각기관과 뇌의 한계가 내가 경험하는 세상의 한계가 된다. 나의 세상과, 개미의 세상과, 고양이의 세상과, 나무늘보의 세상이, 그리고 베짱이의 세상과, 강아지의 세상과, 치타의 세상과, 너의 세상이 다 다르다. 선은 내가 아니라 나의 뇌가 이미 긋고 시작한다. "여기까지~ 더 이상 넘어오면 안 되지~" 이렇게 내가 밟을 수 있는 땅의 크기는 정해진 채로 삶이란 게임은 시작된다.
아무리 넘어오지 말라고 해도 꼭 선을 넘는 사람은 있다. 나와 너의 관계에서 동의 없이 선을 넘으면 그 관계는 불편해지지만, 나와 뇌의 관계에서 선을 넘으면 우리 둘 모두의 세상이 넓어지고 커진다 (나와 뇌는 하나기에 둘 사이에 선을 그으려는 것 자체가 실수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삶이란 몰래 나와 뇌가 우리가 밟을 수 있는 땅의 크기를 넓혀 가는 게임이다. 누군가는 들을 수 있고 만들 수 있는 소리의 종류들을 늘려 간다면, 누군가는 관찰할 수 있고 기록할 수 있는 이야기들의 영역들을 늘려 간다. 다른 뇌가 개척한 새로운 땅을 엿보고 나의 뇌도 땅을 넓혀 간다. 어린 시절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세상의 크기는 이렇게 매일 부쩍부쩍 자라났다. 그 경계가 어디인지 모호해서 보이지 않을 때까지.
뇌에 있어 선을 긋고 땅을 넓혀가는 것은 필연적인 학습의 과정이다. 태어나 첫 몇 년 동안 세상에 존재하는 형체, 색깔, 명암, 움직임 등을 경험하고 구분 짓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면, 그 이후로는 어떠한 것이 형체이며 색깔이고 명암인지 뇌가 인지하지 못한다. 실제로 시신경이 손상되어 세상의 신호를 인지하지 못하던 사람이 간단한 수술로 그 시신경이 복구된다 할지라도 어른이 되어서는 세상을 다시 ‘보지’ 못한다. 세상의 수없이 많은 신호 중에서 어떠한 것을 선택하고 어떠한 신호를 구분해야 하는지, 선을 그을 줄 모르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신호가 존재하고 뇌는 그중의 일부만을 선택한다. 그래서 내 땅을 구분 짓는 선들은 중요하다.
선은 뇌가 긋지만, 그어진 선은 나눈다. 이쪽과 저쪽이 생기고, 안과 밖이 생긴다. 뇌는 한 번 그어진 선을 토대로 나, 가족, 친구, 우리 편을 구분하고, 너, 남, 타인, 상대 편을 확정 짓는다. 그런데 모든 뇌는 "인싸 Insider"이고 싶지, "아싸 Outsider"이고 싶지 않다. 뇌영상 스캐너 안에 누워서 하는 가상의 게임 속에서도 누군가 내 앞에 선을 긋고 나만 소외시키면 뇌는 분노와 슬픔과 아픔을 느낀다. 편의를 위하여 우리는 세상을 나누는 선을 긋지만, 그 나누는 선들은 또다른 누군가의 마음을 난도질하는 선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선을 그을 것인가. 세상은 단 몇 개만의 선으로 나뉘지는 않는다. 남자와 여자, 동양과 서양, 노인과 청년, 진보와 보수, 사랑과 우정… 우리는 무수히 많은 선을 그을 수 있다. 무수히 많은 선을 그을 수 있다는 이야기는 굳이 그어지는 선 한가운데에 서 있는 누군가를 구분하고 편을 나눌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어느 선 중 하나는 나와 너를 나누지만, 또 어느 선 중 하나는 너와 나를 하나 되게 할 테니까.
미국의 시인 월트 휘트먼은 그래서 이렇게 말하지 않았는가.
"내가 모순된가? 그래, 좋다, 나는 나 자신이 모순되게 하리라. (나는 크기에, 내 안에 여러 세상을 품고 있기에)."
Do I contradict myself?
Very well, then I contradict myself.
(I am large, I contain multitudes).
내 뇌 안에는 여러 세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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