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어렵고 낯선 과학책을 수다 떨 듯 쉽고 재미있게 풀어냅니다. ‘읽어본다, SF’를 썼던 지식큐레이터(YG와 JYP의 책걸상 팟캐스트 진행자) 강양구씨가 '한국일보'에 4주마다 금요일에 글을 씁니다.
틈만 나면 한 권씩 사서 선물하는 책이 있다. 호프 자런의 ‘랩 걸’(알마 펴냄). 특히 선후배 여성 과학자 여럿에게 읽기를 권했다. 나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난관을 헤치며 과학자로서의 경력을 쌓아오고 있는 여성 과학자에게 이 책이 작은 위로가 되었으면 했다. 내가 그들과 연대하고 있다는 마음도 전하고 싶었다.
‘랩 걸’의 자런은 사방에 옥수수밭 밖에 없는 미국 미네소타주의 작은 도시에서 1969년에 태어났다. 사남매의 막내딸이었던 그는 어렸을 때부터 과학자를 꿈꿨다. 하지만 미국의 1990년대와 2000년대에도 여성이 과학자가 되어서 생존하기는 쉽지 않았다. ‘랩 걸’은 간절하게 과학자를 꿈꿨던 한 여성이 ‘나는 과학자야!’ 하고 말할 수 있기까지의 여정을 감동적으로 그렸다.
자런은 수많은 시행착오와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자신만의 안정적인 실험실(랩)을 하와이 대학교에 꾸릴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랩 걸’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 실험실에서 자신이 하는 연구를 소개한다. 앞으로 수백 년에 걸쳐서 늘어날 이산화탄소 같은 온실 기체가 대기 중에 많은 환경을 만들고 고구마를 기르는 실험이다.
이산화탄소의 양이 늘어나니 그것을 원료 삼아 광합성을 하는 고구마도 지금보다 더 크게 자랐다. 얼핏 보면 좋은 일이었다. 그런데 자런이 아무리 비료를 줘도 고구마 안에 들어 있는 영양소의 양은 늘어나지 않았다. 예를 들어, 단백질 함유율이 낮았다. 이 실험 결과를 보면서, 나는 어렸을 때 할머니가 해줬던 이야기를 생각했다.
할머니는 고구마가 척박한 땅에서 자랄 때 더 맛있다고 얘기했다. 생존이 어려울수록 고구마가 뿌리에 더 많은 영양소를 저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공기 중에 쉽게 쓸 수 있는 이산화탄소가 많을수록 그 고구마는 뿌리에 영양소를 차곡차곡 쌓아둘 필요가 없어진다. 무서운 일이다. 자런도 이렇게 섬뜩한 해석을 덧붙였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고 가장 배고픈 나라에서는 필요한 단백질의 많은 부분을 고구마에서 얻고 있다. (온실 기체로 지구가 데워진 환경에서 자란) 미래의 커다란 고구마들은 더 많은 사람을 먹여 살려야 하지만, 정작 영양 공급은 덜 하는 일이 벌어질 것이다. 나에게는 이런 문제를 해결할 답이 없다.”
이렇게 “답이 없다”고 단언했던 일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자런은 ‘랩 걸’을 내고 나서 4년 만에 ‘나는 풍요로웠고 지구는 달라졌다’(김영사 펴냄)로 돌아왔다. 그는 자신이 태어난 1969년을 기준점으로 지난 50년간 자신의 삶, 다시 말하면 우리의 삶이 얼마나 ‘풍요로워졌는지’ 또 그것과 반비례해서 지구 환경이 얼마나 ‘엉망진창’이 되었는지를 들려준다.
자런은 이 책에서 “답이 없다”고 단언하는 대신에 현실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다른 미래를 만들어 보자고 제안한다. 최근 몇 년간 읽었던 인류의 현실과 지구의 미래를 고민하는 좋은 책(한스 로슬링의 ‘팩트풀니스’, 조천호의 ‘파란 하늘 빨간 지구’ 등)의 장점을 모조리 모아 놓은 훌륭한 책이다.
그러고 보니, 이미 자런은 ‘랩 걸’에서 이렇게 이야기했었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것이 해결 불가능해서가 아니라, 해결책이 관습에서 벗어나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주기적인 바이러스 유행이나 지구 가열이 초래하는 기후 위기를 벗어나려면 우리가 당연하다 생각하는 관습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자런이 강조한 대로, 우리는 달라져야 한다.
과학책 초심자 권유 지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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