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향한 동물의 복수" 노벨문학상 작가의 생태주의 스릴러

입력
2020.09.25 04:30
수정
2020.09.25 13:43
19면
구독
올가 토카르추크는 사회의 변방으로 밀려난 인물이 자신보다 나약한 존재를 지켜내려 세상과 맞서는 이야기에 주목한다. 사진은 토카르추크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의 한 장면. CinemArt CZ 제공

올가 토카르추크는 사회의 변방으로 밀려난 인물이 자신보다 나약한 존재를 지켜내려 세상과 맞서는 이야기에 주목한다. 사진은 토카르추크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의 한 장면. CinemArt CZ 제공


지난해 발표된 2018 노벨문학상은 폴란드 작가 올가 토카르추크에게 돌아갔다. 국내에는 지금까지 소개된 책이 거의 없던, 생소한 작가다. 노벨상 발표 직후 작가에게 맨부커상을 안긴 ‘방랑자들’이란 작품이 국내에 소개됐다. 그러나 서사적 흐름을 거부하고 짤막한 에피소드를 엮어 큰 그림을 그려내는 작가 특유의 ‘별자리 소설’ 기법 탓에 널리 읽히진 못했다.

이번에 출간된 장편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는 이 장벽을 넘어 토카르추크라는 작가에게로 가는 지름길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시종일관 긴장감을 유지하는 스릴러 플롯으로 독자들을 이야기 속으로 단숨에 끌어당긴다. 2009년 폴란드의 실롱스키 바브진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역시 맨부커상 최종 후보작으로 선정된 작품이다. 폴란드 출신의 감독 아그니에슈카 홀란드가 ‘흔적’(pokot)’이란 제목의 영화로 만들어 2017년도 베를린영화제 은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토카르추크는 홀란드 감독과 시나리오를 함께 썼다.

소설 주인공은 야니나 두셰이코라는 나이든 여성. 동물애호가인 두셰이코는 폴란드와 체코의 경계에 있는 외딴 고원 살며 별장 관리인으로 일한다. 어느 날 이웃집에 남자가 자신의 집에서 질식사하더니, 마을의 경찰서장이 인근 우물에서 끔찍하게 죽은 채 발견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을의 소문난 부자였던 남성도 실종되고, 기이한 살인 사건이 이어진다.


토카르추크 소설에는 채식주의, 생태주의, 동물권 수호 등 작가가 중시하는 가치관이 고스란히 들어가 있다. 토카르추크는 평소에도 사회적 이슈에 대해 적극 발언해왔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토카르추크 소설에는 채식주의, 생태주의, 동물권 수호 등 작가가 중시하는 가치관이 고스란히 들어가 있다. 토카르추크는 평소에도 사회적 이슈에 대해 적극 발언해왔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죽은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동물에게 무자비한 인간이었다는 것. 이웃집 남자는 사냥을 일삼았고, 부자는 정육점과 여우 농장, 도살장과 육가공 농장, 종마 사육장을 운영해 돈을 벌었다. 일련의 살인사건을 지켜보며 두셰이코는 “동물이 인간에게 복수를 하는 것”이라 주장한다. 실제 살인사건 현장에는 동물의 잔해나 발자국들이 발견되고 살인도구에서도 동물의 피가 검출된다.

미스터리한 사건이 연달아 이어지는 범죄 스릴러물 형태를 띠지만, 소설은 범인을 추적하는 것만큼이나 주인공 두셰이코라는 인물을 파고든다. 두셰이코를 이해하는 키워드는 영국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1757~1827), 그리고 ‘점성학’이다.

두셰이코는 인생의 중요한 국면마다 블레이크의 시구를 떠올린다. 소설 각 장 도입부에는 블레이크의 시구가 있고,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는 소설 제목도 블레이크 연작시의 한 구절이다.


주인공 듀셰이코는 동물 사냥을 정당화하는 마을 사람들, 이를 옹호하는 가톨릭교회, 권위적인 지방 경찰서, 모피를 불법 거래하는 농장의 불의와 홀로 맞선다. 사진은 소설은 원작으로 한 영화의 한 장면. CinemArt CZ 제공

주인공 듀셰이코는 동물 사냥을 정당화하는 마을 사람들, 이를 옹호하는 가톨릭교회, 권위적인 지방 경찰서, 모피를 불법 거래하는 농장의 불의와 홀로 맞선다. 사진은 소설은 원작으로 한 영화의 한 장면. CinemArt CZ 제공


점성학은 “그 어떤 사물도 개별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고 본다. “땅을 디딤으로써 우리 몸과 땅을 접촉시키는 바로 그 지점에 모든 비밀이 깃들어 있다”는 믿음이다. 블레이크가 산업혁명 이후 영국의 물질적 타락을 비판한 대표적인 생태주의 예술가임을 연결시켜보면 두셰이크가 어떤 선택을 할런지 짐작할 수 있다. 결국, 두셰이코는 블레이크와 점성학의 이름으로 사냥을 정당화하는 마을 사람들, 이를 옹호하는 가톨릭교회, 권위적인 지방 경찰서, 모피를 불법 거래하는 농장과 맞선다.

소설에서 범죄 만큼이나 끔찍하게 그려지는 건, 인간이 인간 아닌 존재들에게 자행하는 짓이다. 소설은 결말의 작은 반전을 통해, 피해자들의 죽음이 이들이 저지른 짓에 대한 자연의 심판일 수도 있음을 말한다. “인간이 동물을 지옥으로 내모는 순간, 온 세상이 지옥으로 변한다”는 두셰이코의 절박한 외침은 소설에서 하나의 예언으로 작용한다.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민음사 발행. 196쪽. 1만5,000원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민음사 발행. 196쪽. 1만5,000원


소설은 흥미진진한 스릴러이면서, 동시에 평소 생태주의와 채식주의, 동물권 수호에 관심을 갖고 이에 대해 적극적으로 발언해온 작가의 관심사가 녹아든 작품이기도 하다. 실제 토카르추크는 노벨문학상 수상 기념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끝없는 분쟁, 책임 의식의 부재가 세상을 분열시켰고, 함부로 남용했고, 파괴했다.(…) 세상이 죽어가고 있는데, 우리는 심지어 알아차리지도 못하고 있다.”

토카르추크가 ‘방랑자들’로 맨부커상을 수상한 건 2017년. 한국 작가 한강이 ‘채식주의자’로 맨부커상을 수상한 다음 해다. 동유럽과 아시아에서 동시에 주목받은 작가들이 채식주의와 생태주의, 그리고 여성주의를 소설로 다룬다는 점이 공교롭다. 작금의 세계 문학이 어떤 주제, 어떤 작가에게 관심을 기울이는지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어느덧 2주 뒤로 다가온 올해의 노벨문학상 발표가, 더 이상 남의 나라 일처럼 여겨지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소범 기자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 Copyright © Hankookilbo

댓글 0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