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산업화 주역' 포항철강산단, 코로나로 반세기만에 쓰러질 판

입력
2020.09.26 04:30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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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출ㆍ내수 모두 막혀 생산량 갈수록 하락
하청업체ㆍ화물기사까지 도미노로 일감 줄어

철강 관련 공장 350여개가 입주해 있는 경북 포항시 남구 대송면 철강산업단지 내 문을 닫은 공장 한 곳에 23일 매매를 알리는 전단지가 붙어 있다. 포항=김정혜 기자 kjh@hankookilbo.com

철강 관련 공장 350여개가 입주해 있는 경북 포항시 남구 대송면 철강산업단지 내 문을 닫은 공장 한 곳에 23일 매매를 알리는 전단지가 붙어 있다. 포항=김정혜 기자 kjh@hankookilbo.com

지난 23일, 추석을 1주일 앞두고 찾은 경북 포항시 남구 대송면 일대의 포항철강산업단지엔 무거운 정적이 깔렸다. 쭉쭉 뻗은 길에 오가는 차도 사람도 찾기 어려웠다. 흡사 민방위훈련 공습경보라도 발령된 듯. 야적장에는 육중한 철강제품들이 그대로 쌓여 있었고, 그것들을 들어 옮기는 크레인들은 한결같이 ‘열중쉬어’ 자세였다. 산단 바로 옆에 있는 포스코 포항제철소에서 생산한 선재, 강판을 사들인 뒤 재가공해 세계 각국에 내다 판다는 국내 최대의 철강산업단지, ‘영일만의 기적’ 현장이 맞나 싶었다.

‘벌써 추석 연휴에 들어갔나?’ 하는 생각이 들 무렵 만난, 4단지 한 공장 문을 지키고 있던 경비원은 텅 빈 도로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코로나19로 세상이 달라졌다지만, 어떻게 하다 이렇게까지 됐는지 모르겠어."

이 경비원은 이날 마주한 풍경이 1년 전만해도 상상할 수 없었다고 했다. 예전같으면 축구장 1,850개 면적에 빼곡하게 자리 잡은 350여 공장들이 철판을 자르고 붙이고 찍느라 갖은 굉음을 내는 곳이었다. 하루 종일 직원 차량과 대형 트레일러가 뒤섞여 주차 전쟁이 벌어졌고, 특히 명절 연휴를 앞두고선 납기 마감 트럭들로 더 붐볐다. 그는 "코로나19로 공장들이 단축근무, 휴업에 들어가면서 도로가 텅 비었다”며 “폐업하는 공장들도 생기 시작했는데, 이러다 철강산단이 자취를 감추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고 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산으로 경북 포항시 남구 대송면 포항철강산업단지 내 공장마다 일감이 줄면서 23일 오전 4단지 도로가 썰렁한 모습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산으로 경북 포항시 남구 대송면 포항철강산업단지 내 공장마다 일감이 줄면서 23일 오전 4단지 도로가 썰렁한 모습이다.


영일만의 기적 현장 '반세기 최대 위기'

반세기 동안 쉴 새 없이 불꽃을 뿜어 내던 포항철강산단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휘청거리고 있다. 코로나19가 전세계를 경제를 강타하면서 철강업종은 내수는 물론 수출도 꽉 막혔다. 포항철강산단 관리공단에 따르면 올 1~7월 수출실적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2.6% 감소한 14억1,011만달러. 시간이 가면서 수출 감소 폭은 커지는 추세다.

2년 전에도 이곳은 큰 타격을 입은 적이 있다. 미국이 대미수출 물량 3분의 2를 차지하던 파이프류에 관세를 인상하면서 산단 내 근로자 2,000명 가량이 일자리를 잃다시피 했다. 그때도 여기저기서 비명이 들렸다. 하지만 이번엔 충격파가 그 때와 비교조차 어렵다. 강관뿐만 아니라 선박에 쓰이는 후판과 선재, 건설용 H형강 등 사실상 모든 철강 제품 수요가 급감하면서 산단 전체가 고전하고 있다.

포항철강산단 관리공단의 김영헌 관리팀장은 "예년에는 명절도 없이 일하는 회사가 많았는데 올해는 연휴가 닷새로 긴데도 불구하고 연차를 붙여 더 쉬라고 하는 회사가 많다"며 "회사마다 추석 선물 규모를 줄였고, 귀향 특별 보너스는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고 전했다. 실제 이곳 산단 생산액은 사태 직후이던 지난 3월 1조340억원에서 7월 9,150억원으로 줄었다. 포항상공회의소가 최근 추석을 앞두고 지역 철강업체 62곳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작년보다 더 힘들다'고 답한 업체 비율이 56.5%에 달했다. 1년 전 같은 조사에서는 36.5%였다. 김 팀장은 "입주 기업들에게 '요즘 어때요?'라고 안부 묻는 게 미안할 정도"라며 "코로나19가 언제 물러갈지 알 수 없으니 기업들의 답답함은 그 어느 때와 비교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경북 포항 철강산업단지 안에 문을 닫은 한 공장의 모습. 포항=김정혜기자 kjh@hankookilbo.com

경북 포항 철강산업단지 안에 문을 닫은 한 공장의 모습. 포항=김정혜기자 kjh@hankookilbo.com


사람 떠나는 국내 최대 철강산업단지

추석 보너스는 고사하고 해고 통지서만 안 받으면 다행인 게 요즘 이곳 분위기다. 업체들 사정이 나빠지면서 올 들어 7월까지 근로자 148명이 포항철강산단을 떠났다. 정부가 대량해고와 구조조정을 막기 안간힘을 썼지만 역부족이었다. 각 업체의 고용유지지원금 신청도 폭주한다. 올 들어 지난 8월까지 고용노동부 포항고용센터를 통해 지급된 고용유지지원금은 1,115건에 64억7,400만원. 작년 동기 7건, 1억6,700만원이 지급된 것과 비교하면 건수로는 159배, 금액은 39배 늘었다. 포항고용센터 손은칠 지원팀장은 "포항에서 고용유지지원금을 받은 근로자 63%는 철강 제조업 종사자들”이라고 말했다.

경북 포항시 남구 대송면에 위치한 포항철강산업단지 전경. 포항철강산단 관리공단 제공

경북 포항시 남구 대송면에 위치한 포항철강산업단지 전경. 포항철강산단 관리공단 제공


포항철강산단발 위기, 도미노처럼 확산

코로나19가 몰고 온 철강산단의 한파는 다른 업종으로 도미노처럼 이어지고 있다. 내수 중심의 현대제철 포항공장은 수출 위주의 인천공장에 일감이 크게 줄자 포항공장 물량 30%를 떼줬다. 이로 인해 포항공장 하청업체는 물론 화물차 운전기사들도 일감이 크게 줄었다.

철강산단에서 만난 25톤 트레일러 기사 오영학(54)씨는 "지난 5월까지만 해도 매주 주말을 빼고 다섯 차례 조선소가 있는 울산과 전남 목포로 선박용 후판을 실어 날랐는데 지금은 두 번밖에 못 움직이고 있다"고 말했다. 이 바닥에서 20년 가까인 일한 오씨지만 이처럼 혹독한 시간은 처음이다. 1,000만원 정도 되던 월 매출은 7월부터 300만원 밑으로 떨어졌다. 오씨는 "사정이 이렇지만 정부가 화물차 기사에게 준 재난지원금은 딱 한 차례, 150만원이었다"며 "1,000만원짜리 적금을 깬 것도 모자라 최근 은행에서 2,000만원을 빌렸다"고 말했다. 현재 오씨처럼 포항철강산단 제품을 전국으로 실어 나르는 화물차 운전기사는 약 1,500명이다.

경북 포항시 남구 대송면 철강산업단지 2단지 전경. 포항철강산단 관리공단 제공

경북 포항시 남구 대송면 철강산업단지 2단지 전경. 포항철강산단 관리공단 제공


포항철강산단 관리공단 안대관 전무는 "공장 한 곳이 문을 닫으면 근로자는 물론 부양가족까지 장기간 생활고를 겪는데 코로나19와 관련한 정부 정책이 기업보다 개인에게 일시적인 지원금을 주는 방식이라 아쉬움이 많다"고 말했다.


포항= 김정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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