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6년 부산의 개항과 함께 조선은 그전과는 다른 세상이 됐다. 바뀐 세상은 도시 경관의 변화로 나타났고,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예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도시의 모습을 통해 세상이 바뀌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렇게 기존 조선의 도시에서는 볼 수 없었던 건축물 중 일부는 지금까지 남아 근대건축물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있는데, 이들은 주로 일본인과 서양인에 의해 지어졌다.
가장 많이 보이는 것은 적산가옥이라고 불리는 일본식 가옥이다. 주로 군산, 목포와 같은 개항장의 조계지나 대구, 전주 등 전통적인 지역 중심 도시의 옛 읍성 안에 남아 있다. 적산가옥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은 낯선 풍경을 만드는 덕에 최근 관광지로 많이 개발이 되고 있다.
적산가옥이 모여있는 곳에는 어김없이 일본인들이 만든 서양식 건축물이 있다. 적산가옥이 모여있다는 것은 당시 그곳이 도시의 중심이었음을 말한다. 그러니 그 시절 조선을 점령했던 일본인들은 자신의 위세를 뽐내고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멋지고 웅장하게 관공서나 은행 건물을 지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근대건축물이 모여 있는 지역의 근대역사관으로 사용하는 건물 중에는 개화기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조선 침략의 첨병 역할을 했던 기관의 건물이 많다. 아무래도 건물이 멋지고 규모도 있으면서, 근대건축물 밀집 지역인 관광지가 된 일본인 마을 안에 있어서 그런 것 같다. 그렇게 목포일본영사관이,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과 부산지점이, 조선식산은행 강경지점과 대구지점이, 조선은행 군산지점이, 그 도시의 근대를 안내하는 박물관이 되었다.
서양인이 남긴 건축물은 주로 기독교와 관련되어 있다. 천주교, 성공회, 개신교 선교사들은 조선에 와서 많은 건물을 남겼는데, 그중 개신교 선교사들이 남긴 건축물은 한마을을 이뤄 모여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교회만 지은 것이 아니라 넓은 땅을 사서 선교사 사택, 교회, 병원, 학교가 모여 있는 선교기지마을을 만들었다. 선교사들이 자리 잡은 곳은 기존 시가지와 한발 떨어진 얕은 구릉지였다. 이런 구릉지는 조선사람들에게 인기가 없어 싼값에 살 수 있었다. 처음에는 조선인들이 사용하던 집을 그대로 이용하다가 신도가 늘어나고 본국에서의 지원이나 기부가 성사되면, 신도들과 함께 서양식 건물을 하나둘씩 지어 선교기지마을을 완성해 갔다. 병원은 기존 시가지와 가까운 구릉지 아래에 지어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무료 진료도 마다하지 않았다. 조선 사람들은 병원을 통해 과학과 근대를 만났다. 선교사 사택은 언덕 위로 올라갔고, 학교와 교회는 그 사이 즈음에 지어졌다. 전국 34개 도시에 선교기지마을이 지어졌다. 지금은 대부분 철거되거나 건물 한두 개만 남아 있지만, 광주 양림동이나 순천 매곡동에 가면 100년 전 선교기지마을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이렇게 개신교 관련 근대건축물을 찾아다니다 보면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하게 된다. 유난히 3·1만세운동 관련 자료를 많이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당시 교회와 개신교계 학교가 3·1만세운동 전면에 나선 것은 전국적인 현상이었다. 기독교계 학교는 일본의 영향력 아래 있는 공립학교와 양분하여 조선의 근대교육을 담당하고 있었다. 서양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기독교계 학교는 공립학교에 비해 상대적으로 일본의 감시와 간섭에서 자유로울 수 있어 민족주의 교육이 이루어졌다. 민주주의와 자유, 평등, 과학적 사고 등이 기독교계 학교를 통해 학생들에게 전달됐다. 학생들은 근대의 시대정신과 민족의식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3·1만세운동의 전면에 나섰다.
그렇게 광주의 소피아여학교와 대구의 신명여학교, 계성학교에는 3·1만세운동 기념탑이 세워져 있고, 목포 양동교회 출입문에는 태극기가 새겨져 있다. 군산의 3·1운동 100주년 기념관은 군산 선교기지마을인 구암동산에 있다.
그리고 100년이 흘렀다. 지금 전염병이 돌고 있는 우리 도시에서 교회는 어떤 역할을 하고 있고, 어떻게 인식되고 있을까? 100년 전 민족을 걱정하고, 과학 지식을 조선에 전해줬던 개신교를, 이제는 사회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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