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분광학과 광기술 분야를 연구하는 고재현 교수가 일상 생활의 다양한 현상과 과학계의 최신 발견을 물리학적 관점에서 알기 쉽게 조망합니다
심해에서 발견된 완벽한 검정
수심 200미터 근처의 심해에 서식하는 물고기를 연구하던 미국의 동물학자들이 최근 그 곳에서 잡힌 검은색 물고기를 촬영하다가 깜짝 놀랄 일을 겪었다. 어떤 각도, 어떤 조명 하에서도 물고기의 세부적인 모습이 사진에 제대로 담기지 않는 것이었다. 유령처럼 보이던 물고기를 보다 면밀히 조사해 본 그들은 물고기의 검은색 표피가 빛을 거의 완벽히 흡수한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이들을 '울트라-블랙 물고기'(Ultra-black Fish)라 불렀다.
그 후 진행된 체계적인 조사 결과, 16종 물고기의 검은 표피가 입사되는 빛을 대부분 흡수한다는 점과, 특히 한 물고기는 입사되는 빛의 약 0.05%만 반사한다는 점이 확인됐다. 인간이 인공적으로 구현한 가장 검은 물질과 맞먹을 정도의 울트라 블랙이 깊은 바닷속 물고기에서 발견된 것이다. 태양빛이 거의 닿지 않는 칠흑처럼 어두운 곳에 사는 물고기가 왜 자신을 완벽한 검정의 장막 속에 가두어야 했을까?
심해에서도 검정은 자신을 감추기에 가장 유리한 색이다. 어둠이 지배하는 심해에도 빛은 있다. 바로 생체 발광을 하는 포식자나 먹이가 내는 빛이다. 일부 물고기는 반딧불이처럼 생체 내 화학 작용을 통해 생물 발광을 하고 그 빛을 이용해 먹이를 찾는다. 검은 물고기의 입장에서 보자면, 발광하는 물고기가 포식자라면 적발되지 않고 피해 다녀야 하고 그것이 빛을 내는 먹이라면 들키지 않고 은밀히 다가가야 한다.
즉 검정 물고기들은 생물 발광을 하는 상대방의 빛을 최대한 흡수하며 눈에 띄지 않는 방향으로 진화해 온 것이다. 재미있게도 일부 물고기는 내장 주변을 검은 피부가 감싸고 있었다. 이는 발광하는 물고기를 먹이로 섭취했을 때 소화과정에서 나오는 희미한 빛마저 흡수해 자신을 감추기 위한 전략으로 해석됐다. 완벽한 검정을 구현하는 것은 심해의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한 물고기의 '스텔스' 기술인 셈이다.
울트라 블랙은 지상의 생물에서 발견되기도 한다. 암컷에 대한 구애 행동으로 유명한 공작새거미나 극락조의 수컷들은 화려한 색상 주변에 매우 짙은 검정색이 배치된 외양을 띤 경우가 많다. 대부분의 빛을 흡수하는 짙은 검정은 주변에 배치된 색상의 선명도를 높여 수컷을 더욱 돋보이게 만든다. 어둠 속 자신을 감추는 물고기의 위장술로도, 짝짓기에 목매달며 화려함을 뽐내는 수컷의 입장에서도 울트라 블랙은 매우 효과적인 색깔인 것이다.
검정은 과연 어떤 색일까
그렇다면 대체 검정색은 어떤 성격의 색이고, 완벽한 검정이란 무엇일까? 색에 대한 과학적 인식이 없던 고대 그리스 시대에는 다양한 색상이 밝음과 어둠이라는 두 기본 색의 적당한 혼합으로 만들어진다고 생각했다. 가령 황색은 밝음에 가깝고 빨간색과 녹색은 밝음과 어둠이 균형을 이루어 만들어진다고 봤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색이 물리적 실체인 빛과 시각 체계가 협동해 만들어내는 지각 효과라는 것을 안다.
사물의 색은 어떻게 형성될까? 인간이 사물을 보기 위해서는 빛이 있어야 한다. 태양과 조명등이 내는 빛은 일반적으로 무지개색이 고르게 섞인 백색광이다. 이 빛은 물체에 입사된 후 물체 속 원자나 분자들과 상호작용한 후에 일부가 흡수되고 나머지가 반사된다. 즉, 특정한 구조와 전자 배치를 가진 분자들은 자신의 특성과 조응하는 색만을 흡수하고 나머지는 반사한다. 결국 우리가 보는 물체의 색이란 빛이 물체 속에 들어가 분자들과 한바탕 춤추고 난 후에 남은 잔여물이다. 게다가 그 색은 물체가 흡수하지 않고 배제한 색인 셈이다. 가령 빨강 사과의 색은 사과 껍질이 흡수하지 않고 반사해서 배출한 색이라는 이야기다. 이처럼 사물의 색은 무지개색을 모두 포함하는 백색광에서 특정 색상을 흡수해 제거함으로써 구현되고, 그런 면에서 이런 색상 구현 방식을 ‘감법 혼색’이라 부르는 건 자연스럽다. 오늘날 인류는 과학자들이 만든 수천 종의 염료 덕분에 어떤 색이든 값싸고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
색은 미세한 구조물을 이용해 형성될 수도 있다. 대표적인 예가 CD나 DVD다. 이 저장장치들의 뒷면에서 반사된 빛이 각도에 따라 무지개색을 띠는 건 누구나 경험한 적이 있을 것이다. 이들의 뒷면에는 데이터 저장에 쓰이는 미세한 홈이 동심원 모양으로 새겨져 있다. 각 홈에 부딪힌 빛은 회절에 의해 퍼져 나가면서 특정 방향으로 특정 색상이 강해지며 무지개색으로 나뉜다. 자연에선 나비나 풍뎅이 등 다양한 생물이 표피의 미세 구조를 이용해 아름다운 색상을 연출한다.
백색광이 모든 색상을 포용해 흰색으로 보이는데 반해, 검은색이란 일체의 색상을 배제한 상태를 나타낸다. 즉 사물에 입사된 가시광선이 반사되지 않고 100% 흡수되면 이상적인 검정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완벽한 검정을 만드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표면에 부딪힌 빚을 전혀 반사하지 않고 100% 흡수하는 것이다.
검정의 연출에는 두 가지 방식이 동원된다. 첫째는 특정 색상의 빛만 흡수하는 염료 대신 모든 색을 흡수하는 색소 성분을 이용하는 것이다. 생체 조직 속 멜라닌이 그 역할을 한다. 사람 피부 속 멜라닌 색소는 태양의 자외선을 흡수해 신체를 보호한다. 심해의 검정 물고기를 조사한 학자들은 물고기 표피가 멜라노솜(melanosome)이라 불리는, 달걀처럼 생긴 흑색 소세포에 의해 채워져 있음을 확인했다. 이 표피에 입사되는 빛은 멜라노솜 사이를 지그재그로 진행하면서 이들에 의해 거의 완벽히 흡수된다.
다른 한 가지 방식은 매우 복잡한 형상의 표피나 비늘을 이용하는 것이다. 가령 일부 나비의 검은색 비늘에는 미세한 기둥 위에 스폰지와 같은 구멍들이 뚫린 복잡한 구조가 형성되어 있다. 그 속에 들어온 빛은 흡사 엄청나게 복잡한 3차원 미로 속에 갇힌 사람처럼 외부로 탈출하지 못하고 내부에 갇힌 채 여러번의 반사를 거치다가 결국 흡수되고 만다. 울트라 블랙을 구현하는 일부 거미나 새, 나비는 매우 복잡한 구조물과 넓은 표면적을 활용해 빛의 흡수를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진화해 온 셈이다.
울트라 블랙의 활용법
심해 검정 물고기의 위장 전술이나 지상 일부 생물의 짝짓기에 유리하게 활용되어온 울트라 블랙이 인간에게는 어떤 쓸모가 있을까? 심해 물고기처럼 우리도 이 블랙을 위장술에 활용할 수 있다. 인간은 물체의 표면에서 다양한 각도와 세기로 반사되는 빛을 감지해서 물체의 3차원 형상을 인식한다. 그런데 입사되는 빛의 불과 수천 분의 일 정도만 반사하는 검정 물질로 물체 표면을 모두 덮는다면 우리는 해당 물체의 형상을 전혀 인지할 수 없다. 공간 속에 그저 검은 구멍이 하나 뚫려 있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울트라 블랙은 망원경처럼 희미한 빛을 제어하는 장치에도 유용하다. 천체 망원경은 별이나 은하의 빛을 커다란 반사경으로 집광해 영상을 구현한다. 이때 장치 내부의 미세한 표면 결함 등에 의해 산란되어 떠도는 빛은 선명한 영상 획득에 방해가 된다. 울트라 블랙 물질을 이용한 코팅은 망원경을 포함한 광학 장비들 내 떠도는 빛을 흡수해 성능을 향상시키는 필수 요소다. 울트라 블랙은 이 외 태양광을 이용한 발전이나 레이더 회피 기술에도 적용되는 등 활용 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인간이 만든 최강의 블랙은 무엇일까? 탄소 분자들이 튜브 형상으로 말린 탄소나노튜브가 숲 속의 나무처럼 수직으로 정렬한 물질이다. 작년 MIT 연구팀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이 물질은 입사되는 빛의 0.005%만 반사시킨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울트라 블랙 코팅은 상당히 비싼 물질이라 범용으로 사용되기는 어렵다.
심해의 물고기 표면에서 발견된 구조는 저렴한 방법으로 울트라 블랙을 구현할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 연구에 참여한 과학자들이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이용해 반사율이 가장 낮은 멜라노솜의 분포와 형상을 조사한 결과 심해 물고기에서 발견된 형상을 얻었다고 한다. 이 물고기들은 오랜 진화의 과정 속에서 이미 최적화된 블랙을 구현해 왔던 것이다. 과학자와 공학자들이 부딪히는 여러 문제의 답은 이미 자연에 있을 수도 있다. 그 답을 찾기 위해 지금도 과학자들은 심해와 밀림, 극지를 포함한 전세계를 누비며 열정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