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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과 프랑스의 동상이몽… ‘도자기 외교’

입력
2020.09.05 04:30
14면

<26> 고종이 사랑한 프랑스 도자기

편집자주

여러분처럼 조선의 왕이나 왕비도 각자 취향이 있었고 거기에 마음을 쏟았습니다.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 학예사들이 그간 쉽게 접하지 못했던 왕실 인물들의 취미와 관심거리, 이를 둘러싼 역사적 비화를 <한국일보> 에 격주로 토요일에 소개합니다.


“나(고종)는 프랑스가 그들이 생산하는 예술작품들로 유명하다고 자주 들었으나 이렇게 아름다운 것을 보는 것은 처음이다. (중략) 나는 이 선물을 조선에 대한 당신의 정부가 보여주는 우정의 증거로 여긴다. 귀 국 대통령의 호의에 감사드린다고 전하기 바란다.” -빅토르 콜랭 드 플랑시 조선 초대 프랑스 공사가 프랑스 외무부에 보낸 정치서한

조선 초대 프랑스 공사 빅토르 콜랭 드 플랑시(Victor Collin de Plancyㆍ1853~1922)는 조선 부임과 동시에 양국의 수교를 기념하여 도자기 세 점을 바쳤다. 공사가 프랑스 외무부에 보낸 정치서한에 따르면, 붉은 색 비단 천으로 싸인 세 점의 도자기는 가마에 태워져 왕만이 드나들 수 있는 정전 한가운데 문을 통해 옮겨졌다. 고종은 이 도자기를 보고 깊은 감명을 표하였다.

조선에서 서구와 조약을 체결하고 수교 기념 도자기를 받은 일은 전례가 없었다. 프랑스 사디 카르노(Marie Francois Sadi Carnotㆍ재임 1887~1894) 대통령이 조선에 선물한 ‘백자 채색 살라미나 병’과 ‘백자 채색 클로디옹 병’ 한 쌍은 프랑스 국영 세브르 도자제작소(Manufacture National de Sevres)에서 만든 것이다.

세브르 자기는 문화강국인 프랑스에서도 오래전부터 전 세계 왕실과 귀족들의 권력을 대변하는 최고의 예술품으로 인정받아 왔다. 프랑스는 자국의 우수성과 강점이 최대한 드러날 수 있는 예술품으로 첨단 기술과 프랑스의 문화적 전통이 융합된 세브르의 대형 화병을 선택하였다.


1878년 프랑스 국립세브르 도자제작소 제작한 높이 62.1cm 백자 채색 살라미나 병. 조불수호조약(1886년) 체결을 기념하여 프랑스 대통령이 조선에 선물했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1878년 프랑스 국립세브르 도자제작소 제작한 높이 62.1cm 백자 채색 살라미나 병. 조불수호조약(1886년) 체결을 기념하여 프랑스 대통령이 조선에 선물했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이 화병들은 1883년부터 1895년까지 조선의 대외 교섭에 관한 일을 관장한 문서에 ‘세교정묘(細巧精妙)’라 묘사되어 있을 정도로 섬세하고 정교한 작품이다. 그중 전체 높이 62.1cm에 이르는 ‘백자 채색 살라미나 병’은 금 안료로 제작 연도인 ‘1878’과 ‘C-Carno…’가 쓰여 있어 프랑스공화국 대통령 명의의 선물임을 알 수 있다.

화려한 꽃 장식 그림은 세브르 소속 화가로 활동 했던 외젠 알렉산드로 블롯(Eugene-Alexandre Bulotㆍ생몰미상ㆍ세브르 활동 시기 1855~1883)의 작품이다. 전체 모양은 고대 도기 형태에서 유래된 것으로 그리스 문화를 숭상한 로마 시대에는 정원 장식품으로 쓰였고, 신고전주의 태동과 맞물려 세브르를 대표하는 양식으로 재탄생되었다. 여러모로 이 화병들은 국가적 선물에 걸맞는 프랑스 대표 예술품으로 손색 없다.

조선은 프랑스와 1886년(고종 23) 미국, 영국,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에 이어 서양 열강들 중 여섯 번째로 조약을 체결하였다. 프랑스는 병인년(1866년) 자국 신부 9명이 사형 당한 일을 빌미로 강화도에서 격전을 벌이고 난 이후에도 계속하여 천주교 포교를 요구하였다. 결국 조선정부가 프랑스의 요구를 우회적으로나마 수용함으로써 조약을 맺을 수 있었다.

프랑스는 병인양요에서 비롯된 침략국의 이미지를 상쇄하고 자국의 예술적 자부심을 드러낼 수 있는 도자기를 봉헌하여 조선의 환심을 사고자 했다. 점차 우호국으로 인식되면 프랑스의 입장에서 조선에 진출하기 훨씬 유리한 여건이 마련되는 것이며, 자연스럽게 프랑스의 영향력을 확대시킬 수 있었다.


1904~1905년경 빅토르 콜랭 드 플랑시 공사. 콜랭 드 플랑시는 총 13년간 조선에 머무르며 한국의 다양한 도자기를 수집하였다. 프랑스 외교문서보관소 제공

1904~1905년경 빅토르 콜랭 드 플랑시 공사. 콜랭 드 플랑시는 총 13년간 조선에 머무르며 한국의 다양한 도자기를 수집하였다. 프랑스 외교문서보관소 제공


프랑스 외무부는 1888년 조선에 콜랭 드 플랑시 공사를 파견하면서 최우선적으로 프랑스 선교사들의 신분을 보호하라는 훈령을 하달하였다. 선교사들은 직간접적으로 자신들의 거점 지역의 수많은 정보를 다양한 경로를 통해 프랑스에 제공하였다. 이 정보는 프랑스의 국가 정책 수립과 여러 학문, 산업분야에 유용하게 활용되었다.

프랑스는 표면적으로 선교사의 활동을 지원함으로써 군사ㆍ외교적 충돌을 피하고, 프랑스의 문화와 언어의 확산을 꾀하였다. 따라서 초대 프랑스 공사는 정치 경제적 의도는 드러내지 않으면서 프랑스 외무부가 지시한 목적을 달성해야 했다. 이에 따라 세브르 도자기를 수교 예물로 봉헌하자고 건의한 것도 콜랭 드 플랑시 공사였다.

당시 프랑스 정부는 외교사절을 활용한 박물관 소장품 확대 사업을 전개하였다. 콜랭 드 플랑시 공사는 프랑스의 동양어대학에서 중국어를 전공했을 만큼 동양학에 관심이 많았으며, 이미 조선에 오기 전부터 세브르 박물관 소장가 모임의 일원이었다. 여러 면에서 콜랭 드 플랑시 공사는 정치, 경제, 문화예술 등 조불 관계 전반의 우호적인 협력을 전개하고 프랑스 문화정책을 수행하는 외교사절로 적임자였다.

도자기 예물을 봉헌하며 구축하려 했던 프랑스의 이미지 메이킹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것으로 보인다. 고종은 정교한 도자기 예물을 직접 본 이후 프랑스를 기술적 진보를 이룩한 나라로 인식하였다. 비록 협상이 결렬되기는 했지만, 1897년 고종은 조선의 공업을 발전시키고자 프랑스에 사기 기술 공장 초빙을 요청하였다. 콜랭 드 플랑시 공사에게 프랑스 건축가 고용과, 삽화가 들어 있는 프랑스 건축 서적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결과적으로 예술품으로 무장한 프랑스의 전략은 소기의 성과를 거둔 것이다.


12~13세기 고려에서 제작된 높이 7.1㎝ 청자 앵무새무늬 대접(위)과 높이 7㎝ 청자 모란넝쿨무늬 꽃모양 대접. 고종이 프랑스에 보낸 답례품이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사진 제공

12~13세기 고려에서 제작된 높이 7.1㎝ 청자 앵무새무늬 대접(위)과 높이 7㎝ 청자 모란넝쿨무늬 꽃모양 대접. 고종이 프랑스에 보낸 답례품이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사진 제공


세브르 화병에 대한 답례로 고종은 그 해 10월 프랑스 대통령에게 청자대접 두 점과 왕실공예품 ‘반화(盤花)’ 한 쌍을 보냈다. 콜랭 드 플랑시 공사는 카르노 대통령에게 이 우수한 청자대접 두 점의 소장처로 세브르를 추천했고, 카르노 대통령이 이를 받아들여 1889년 3월 세브르 박물관에 기증하였다.

이 청자대접 두 점 외에 다른 선물들은 카르노 대통령 개인이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 국립기메동양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반화’ 한 쌍은 박물관 근처에 살던 카르노 대통령 후손이 1945년에 기증한 것이다. 박물관의 유물 카드에는 ‘한국의 왕(roi de coree)이 대통령에게 선물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분재 장식품은 여러 측면에서 궁중에서 쓰였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정작 국내에는 이러한 실물이 남아있지 않아 매우 귀한 문화재이다.


19세기 후반 조선에서 제작된 높이 47㎝ 반화. 놋쇠 받침 위에 각종 보석류로 나무와 꽃을 만든 장식품이다. 왕실 공예의 한 예다. 프랑스 국립기메동양박물관 소장,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19세기 후반 조선에서 제작된 높이 47㎝ 반화. 놋쇠 받침 위에 각종 보석류로 나무와 꽃을 만든 장식품이다. 왕실 공예의 한 예다. 프랑스 국립기메동양박물관 소장,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조선과 프랑스의 수교 예물에는 양국의 동상이몽이 담겨 있다. 프랑스가 조선에 세브르 도자기를 수교 예물로 봉헌한 것은 표면적으로 양국 간 우애를 공고히 함과 동시에 조선 내 자국의 입지를 다지기 위한 고도로 전략화 된 정책의 일환이었다.

고종이 보낸 ‘반화’는 표현 방식을 일컬어 ‘금지옥엽(金枝玉葉)’이라고도 불린다. 금으로 된 가지와 옥으로 된 잎이라는 뜻으로, 임금의 가족을 높여 부르고 귀한 자손을 이르는 뜻이다. ‘청자 앵무새무늬 대접’에 새겨진 두 마리의 앵무새는 화목을 상징하는 길상무늬이다. 국가의 운명이 풍전등화에 처했던 19세기말, 프랑스 대통령 가족의 화목과 대대손손 번창을 빌어주며 고종이 꿈꿨던 미래는 희망적이었을지 모른다.

개항 이후 조선은 밀려드는 외세에 더 이상 군사적으로 맞서기 보다는 국제 사회가 인정하는 근대국가로 거듭나기 위한 외교 관계 변화를 모색하였다. 서양 각국과 근대적 조약을 체결하고, 프랑스와 수교 기념 도자기 예물을 주고받은 것도 이러한 노력의 연장선상이었다.

조선왕실에서는 철저히 제도에 맞춰 백자를 사용하였고, 이는 500년간 이어졌다. 왕실기물의 변화에 있어 보수적이었던 조선에서 서양과 수교를 맺고 궁중에 서양식 도자기를 수용하였던 것은 어쩌면 그들에겐 국운을 건 도전이었을지 모른다. 국립고궁박물관에는 이 시기 서양과 일본, 중국에서 수입된 서양식 도자기가 다수 남아있다. 조선왕실의 유산으로 남아 있는 도자기 예물과 서양식 도자기는 단순히 화려한 사치품이 아니라, 조선왕실이 처했던 도전의 역사와 우리가 맞닥뜨릴 미래의 수많은 도전을 동시에 담고 있다.


곽희원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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