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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가 한국에서만 살아남은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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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들에게 도시는 살기도(live), 사기도(buy) 어려운 곳이 되고 있습니다. 부동산은 치솟고 거주 양극화는 갈수록 심해집니다. 이런 불평등과 모순은 어디에서 비롯된 걸까요. 도시 전문가의 눈으로 도시를 둘러싼 여러 이슈를 하나씩 짚어보려 합니다. 주택과 부동산 정책, 도시계획을 전공한 김진유 경기대 교수가 <한국일보>에 3주에 한 번씩 연재합니다.
<8> 전세제도의 기원과 의미
100년 가까이 가장 대중적인 임대계약 형태로 자리잡은 전세제도가 사라질 운명에 처했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다른 나라처럼 월세가 대세로 자리잡으며 자연스럽게 소멸되지 않겠냐는 논리다. 반면 월세보다 세입자에게 유리한 제도인 데다 내 집 마련을 위한 '주거사다리' 구실을 해온 만큼 전세를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사실 한국처럼 탄탄한 금융시스템을 갖춘 나라 중에 전세가 운영되는 사례는 없다. 볼리비아에 안티크레티코(anticretico)나 인도의 보기(bogey)ㆍ거비(girvy)를 비롯해 모로코와 콜롬비아에도 전세와 유사한 제도가 있지만, 금융제도가 취약한 나라라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세계적으로 드문 제도라는 이유만으로 없어지는 게 자연스럽다는 주장은 동의하기 어렵다. 오히려 국제적인 금융시스템을 갖추고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가 됐음에도 전세가 살아남은 이유를 충분히 검토하고 논의해볼 필요가 있다.
인류 역사를 보면 전세가 아주 희귀한 제도는 아니었다. 전세의 원조는 기원전 15세기 메소포타미아 시대 안티크레시스(antichresis)를 꼽을 수 있다. 안티크레시스의 사전적 의미는 ‘채권자가 채무자의 부동산을 점유하고 원리금 대신 해당 부동산에서 발생하는 수익을 취하는 계약’이다.
고대도시 누지(Nuzi)에서 발견된 점토판에 새겨져 있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안티크레시스는 아들을 6년간 빌려주고 보리를 꾸어오는 계약이었다. 채무자의 아들은 보리를 빌려준 집에 가서 이자 대신 6년간 노동력을 제공하는데, 6년 후 집으로 돌아오려면 빌려간 양만큼 보리를 갚아야 한다. 14명이 계약을 보증하기 위해 하단에 이름을 새겼다. 이후 바빌로니아, 그리스, 이탈리아를 거쳐 프랑스의 나폴레옹법전에도 안티크레시스가 등장한다.
안티크레시스는 다양한 경로로 세계에 전파된 것으로 추정된다. 인도는 해상실크로드를 통해 방갈로르(Bangalore)와 수랏(Surat)에 전해졌을 가능성이 있고, 볼리비아는 피사로에 의해 정복된 후 스페인으로부터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법체계를 도입한 루이지애나 민법(Louisiana Civil Code)에도 안티크레시스가 수록되어 있다.
우리나라는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을 거쳐 전세 제도가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전당(典當)이 부동산을 포함하게 된 것은 당나라 때인 7~10세기인데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이후 고려 시대로 추정된다. 조선에서는 태조(1392년) 때 ‘해전고(解典庫)’라는 부서에서 전당(典當)을 관장한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나온다.
전세(傳貰)라는 말이 본격 등장한 것은 개화기 때였다. 전세의 전신인 가사전당(家舍典當)의 최초기록은 서울대 규장각 고문서에서 발견되는데 조선후기인 1898년 10월 고생원과 이생원의 종들 사이에 체결된 것이었다.
윤대성 창원대 교수는 1876년 강화도계약 체결로 부산, 인천, 원산이 개항하면서 주택수요가 급증해 전세계약이 활발해졌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시골에서 전답을 팔아 서울로 올라온 경우 당장 수입은 없지만 일정한 목돈을 가지고 있었고, 집을 가진 상인들은 월세 대신 전세보증금을 받아 사업자금으로 쓰는 것이 훨씬 유용했을 것이란 이유다. 조선총독부가 1913년에 발간한 <관습조사보고서>에 공식적인 ‘전세’기록이 나오는데 기간은 지방은 1년, 한성부는 통상 100일이었다고 한다.
임대차계약이면서 사금융의 일종인 전세제도가 유독 한국에서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은 그 만큼 장점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월세-전세-자가로 이어지는 주거사다리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사회초년생 시절 월세로 살며 목돈을 모아 전셋집을 얻은 후 점차 늘어난 전세금을 종잣돈 삼아 내 집 마련을 하는 식이다.
전세가 없는 나라에선 월세로 살다 장기대출인 모기지(Mortgage)를 이용해 자가를 마련하는 것이 보통이다. 명목상 자기집이지만 매달 원금과 이자를 내야 하므로 시세차익이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것을 제외하면 임대주택에 사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2008년 서브프라임 사태를 겪으면서 많은 미국인들이 집을 잃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사실 시세차익이 보장된 것도 아니다.
주거비 측면에서도 전세는 월세에 비해 유리하다. 올해 6월 기준 한국감정원의 전월세전환율은 서울 5.0%(전국 5.9%)인데, 이를 적용하면 보증금 1억원을 월세로 전환할 경우 월 42만원(연 500만원)을 내야 한다. 시중 대출금리는 2.5% 내외이므로 전세보증금 1억을 대출받으면 반값인 월 21만원을 이자로 내면 된다. 자기 돈으로 전세금을 마련한 경우에도 시중 은행금리가 1~2%에 불과해 포기하는 기회비용이 20만원 이하다. 어떤 경우라도 전세의 주거비가 월세보다 절반 이하인 셈이다. 반대로 말하면 임대인은 전세금을 받아 은행에 넣는 것보다 월세전환이 유리하기 때문에 저금리 시대에는 월세를 선호하게 된다.
그렇다고 전세제도가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가장 치명적인 문제는 보증금 미반환 위험이다. 확정일자제도와 보증보험을 통해 위험을 제거할 수 있지만 사각지대가 존재한다. 예를 들어 매매가가 전세가 밑으로 떨어지는 경우엔 확정일자를 받았다 하더라도 보증보험을 들지 않았다면 전세금 전액을 돌려받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최근 들어서는 전세가 부동산 투기를 조장하는 원흉이라는 지적도 심심치 않게 제기된다. 매매가와 전세가 차이(갭)가 작은 경우엔 적은 돈으로도 여러 채를 사서 임대수익과 시세차익을 추구하는 갭투자가 활발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전세를 이용한 갭투자는 전세주택공급을 확대하는 역할을 하며 전세시장을 안정화시키는 데에 일조하는 순기능도 있다. 다만 갭투자가 많은 상황에서 주택시장에 충격이 오면 임차인들에게 더 큰 위협이 될 수 있다. 전세가가 폭락하면 전세보증금을 제때에 반환하지 못하는 상황이 연쇄적으로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전세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한마디로 단언하기엔 변수가 너무 많다. 집값이 안정되고 은행대출이 쉬워지면 전세는 점차 월세로 전환될 것이다. 그러나 매매가 상승률이 높아지고 은행대출이 어려워진다면 다시 전세비중이 증가할 수도 있다.
다만 한가지는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다. 어떤 경우라도 전세가 해외의 순수월세형태로 전환되기는 어려울 것이란 점이다. 전세의 월세 전환은 대부분 보증부월세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모두 월세화되기에는 전세보증금의 규모가 너무 커서 세입자가 매달 부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전망을 넘어 당위의 측면도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순기능이 적지 않은 전세를 없애는 것이 과연 바람직하냐는 질문이다. 전세제도가 있는 덕에 한국은 주거선택의 다양성이 높은 나라로 꼽힌다. 전세와 보증부월세가 있는 우리나라는 각자의 사정에 따라 보증금과 월세를 조정하면서 최적화할 수 있어서 옵션이 많은 매우 유연한 주택시장을 형성하고 있다. 임차인 입장에서 목돈이 있는 사람은 전세를 선택하고, 목돈은 없지만 월수입이 안정적이면 월세계약을 하면 된다. 마찬가지로 임대인도 노후소득을 위해 임대소득이 필요하면 월세로, 전세자금을 융통할 필요가 있으면 전세로 내놓으면 된다. 월세시대의 도래가 나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반갑지도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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