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갑 60만원, 운동화 70만원... 명품에 빠진 10대들

입력
2020.08.06 04:30
'석달 꼬박' 아르바이트해 번 돈으로 명품 'FLEX'  
SNS 사진 한장으로 정체성 증명하는 10대에게
명품은 일종의 '계급장'

고등학생들이 신은 수십만원 대 운동화. 이 중 박모군이 신은 운동화(가운데)는 무려 80만원대로, 3개월 동안 꼬박 아르바이트를 해 모은 돈으로 구입했다.

인천에 사는 고등학생 강모(18)군은 주말마다 고깃집에서 종일 아르바이트를 한다. 그렇게 버는 돈은 한 달에 40만원 내외, 그 돈을 모두 털어 서너 달에 한 번씩 명품을 구입한다. 강군이 평소 즐겨 신는 ‘발렌티노’ 운동화는 70만원대, 얼마 전 구입한 ‘보테가베네타’의 가죽 지갑은 60만원대다. 몇 년 전만 해도 40~50대 중년 남성들이 즐겨 찾는 모델이었지만, 최근엔 10대들 사이에서 한 반에 한두 명 정도는 갖고 있는 ‘흔한 아이템’이 됐다. ‘힘들게 번 돈을 명품 구입에 모조리 쓰는 이유가 뭐냐’고 묻자 간단한 대답이 돌아왔다. “멋있어 보이잖아요.” 하나를 사도, ‘있어 보이는걸’ 사고 싶다는 게 이유라면 이유였다.

140만원대 '생로랑' 클러치백을 끼고 40만원대 '골든구스' 운동화를 신은 한 청소년이 지난달 30일 인천에서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고 있다. SNS에 올린 사진 한 장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증명하려는 10대들 사이에서 명품이 계급장처럼 통하고 있다.


10대가 명품 시장의 새로운 주 고객층으로 떠오르고 있다. 2030세대 사이에서 유행하는 ‘플렉스(Flexㆍ사치품 구매에 큰돈을 소비하며 부를 과시하는) 문화'가 10대에까지 영향을 미친 결과다. 지난 1월 '스마트학생복'이 중고등학생 350여 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조사에 따르면, 절반이 넘는 56.4%가 ‘명품을 산 적이 있다’고 답했다. 저성장 시대에 태어나 불확실한 미래보단 현재의 만족에 투자하는 ‘Z세대’가 국내 명품 시장을 견인하는 ‘큰손 꿈나무’로 등장한 것이다.

강모(17)군이 교복 셔츠 위로 50만원대 명품 지갑을 자랑스럽게 들어 올리고 있다.


얼마 전 80만원대 '구찌' 운동화를 구입한 박모(17)군은 벌써 소장하고 있는 명품 개수만 다섯 손가락을 훌쩍 넘는다. 주변 친구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지금 제 옆의 친구들이 신은 신발도 다 명품이에요. 얘가 신은 건 50만원짜리 '골든구스'고, 쟤가 신은 스니커즈는 40만원짜리 ‘알렉산더 맥퀸’이죠.” 10대들 사이에서 특히 인기 있는 품목은 브랜드 로고가 커다랗게 박힌 외투나 지갑, 운동화다. 교복을 입고도 착용하거나 소지할 수 있고, '고가'라는 걸 단번에 알 수 있는 디자인이 적용된 제품들이다.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 틱톡처럼 동영상ᆞ사진 기반 플랫폼에 익숙한 10대들에게 명품은 가장 강력한 ‘자기과시’ 수단이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린 한 컷의 사진만으로도 존재감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샤넬의 공식 홍보대사인 인기 아이돌 그룹 블랙핑크의 제니와 펜디를 즐겨 착용하는 힙합스타 지코의 모습. SNS 캡처

10대의 명품 소비는 ‘힙합'의 유행과도 맞물려 있다. 특히, 2012년~2019년 방영된 힙합 오디션 프로그램 ‘쇼미더머니’에선 어린 나이에 큰돈을 번 뮤지션들이 수백만 원짜리 명품을 쓸어 담는 모습이 근사하게 묘사됐다. 젊은 세대 사이에서 모방 소비가 이어지자 명품 브랜드들은 아예 이들이 선호하는 캐주얼한 디자인을 대거 선보이는 등 타깃 연령대를 파격적으로 낮췄다. 구찌나 버버리, 셀린느와 같은 전통 명품 브랜드들이 ‘가품’을 의심케 할 만큼 커다란 로고의 면 티셔츠를 선보인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10대 후반의 아이돌 스타들까지 명품 광고 모델로 나서면서 대중문화 흐름에 민감한 청소년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블랙핑크, 방탄소년단, 엑소, 아이유 등 인기 아이돌들이 즐겨 착용하는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 구찌는 10대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있는 브랜드다. 130만원대 구찌 클러치를 옆구리에 낀 10대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10대 사이에서 명품 소비는 일종의 ‘또래 문화’가 됐다. 중학생 때 처음으로 명품 운동화를 구입했다는 신모(18)양은 “명품에 대해 딱히 별생각 없던 애들도 SNS에 올라온 친구들의 명품 인증샷을 보면서 ‘나도 사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 경우가 많다”며 “한 친구는 결국 서너 달 꼬박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으로 루이비통 지갑을 샀다”고 말했다. ‘가품’을 의심하는 친구에게 보여 주기 위해 구매 영수증이나 정품 보증서를 함께 챙겨 다니는 경우도 적지 않다.

신양은 뒤이어 “정품 박스를 잘 보관해 두었다가 중고로 내다팔고는, 돈을 보태 더 비싼 명품을 사는 친구들도 있다”며 “워낙 많은 친구들이 명품을 사고팔다 보니 청소년들 사이에서 중고 명품 시장도 매우 커졌다”고 말했다. 특히 남학생들이 선호하는 명품 브랜드 ‘스톤 아일랜드’의 경우, 옷에 붙어 있는 ‘로고 와펜’만 따로 떼어 내 고가에 사고파는 일도 흔하다.

방탄소년단 뷔가 즐겨 착용해 10대 남학생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기 시작한 셀린느의 로고 티셔츠는 50만원을 호가한다.


문제는 분수에 맞지 않는 명품 소비가 청소년들의 과소비 풍조를 조장하는 데만 그치지 않고 범죄에까지 손을 대게 할 위험이 크다는 것이다. 실제로 명품 구매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불법 도박을 일삼는 청소년들이 적지 않다. 고등학생 장모(17)양은 “같은 반 남학생이 온라인 도박 게임으로 돈을 크게 벌어 명품을 사더니, 다른 친구들에게도 권유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며 “심지어 친구들한테 5만~10만원씩 빼앗아 도박 게임을 하는 애들도 있다”고 말했다. 신양은 “여학생들은 ‘조건만남’이나 ‘성형외과 모델’ 같은 고수익 불법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SNS에서 ‘고액 아르바이트’라는 이름으로 떠도는 보이스피싱 인출책 공모에까지 기웃거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

80만원대 구찌 운동화에 220만원대 고야드 클러치를 든 한 10대 청소년의 모습. 이들은 수개월간 주말 아르바이트를 한 돈을 한꺼번에 명품 구매에 탕진한다.


교실 내 절도 행위도 부쩍 늘었다. 특히 명품 지갑은 교실에서 자주 사라지는 ‘단골 품목’ 중 하나다. SNS의 중고등학교 커뮤니티를 살펴보면 구찌나 루이비통과 같은 수십만 원대 지갑을 찾는 게시글이 끊이지 않는다. 신양은 “나도 명품 지갑을 학교에서 잃어버린 적이 있었는데, 신분증이 꽂혀 있었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며 “워낙 도난당하는 경우가 많다 보니, 힘들게 산 명품 지갑을 학교에는 잘 안 들고 다니는 친구들도 많다”고 말했다. 지난해 12월 광주에서는 남자 고등학생 두 명이 고가의 명품 패딩을 몰래 훔친 후 이를 SNS에 올렸다가 덜미를 잡혔다.

박지윤 기자
서현희 인턴기자
전윤재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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