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최숙현 선수의 죽음이 가슴 아프다. 운동선수에게 우승도 중요하지만,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된 뒤에 받는 상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실컷 얻어맞고 목에 거는 메달은 상처뿐인 영광에 불과하다.
‘상처뿐인 영광’은 영화제목이다. 1956년 제작된 그 영화의 원래 제목은 '저 높이 계신 분이 나를 좋아해(Somebody Up There Likes Me)'다. 그런데 일본의 영화수입사가 그 제목에서 종교색을 지우려다가 역사에 남는 명문구를 만들었다.
그 영화는 1940년대 미국의 복싱 영웅 토머스 바벨라의 삶을 그렸다. 결점이 많은 상처투성이의 하류 인생도 ‘그분’이 결국 다시 일으켜 세운다는, 기독교적 구원이 주제다. 뉴욕 빈민가에서 태어난 토머스는 형한테 맞고 자랐다. 복서 출신의 이탈리아 이민 아버지는 세 살 터울의 어린 형제들에게 권투시합을 시키고, 동네 사람들과 돈내기를 했다.
소년원을 제집처럼 드나들며 자란 토머스는 불량배였다. 군대에 들어간 뒤에는 상관 폭행과 병영 이탈로 징계가 끊이지 않았다. 자칫 교도소에서 인생을 끝낼 위기에 처했을 때 그의 자질을 아까워하는 복싱 코치의 도움으로 갱생의 길을 걷게 되었다.
프로 복서 토머스는 상대를 단 한 방에 눕히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래서 ‘로키’ 즉, 바위주먹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러다가 자기처럼 밑바닥 인생을 살아온 토니 제일과 맞붙었다. 토니의 별명은 강철이었다.
바위와 강철의 맞대결에서 로키는 잘 나가다가 한 대 잘못 맞아 6라운드에서 KO패했다. 두 번째 경기는 정확히 그 반대였다. 계속 몰리다가 6라운드에 한 방으로 KO승했다. 세 번째는 3 라운드 만에 KO패했다. 그 극적인 명승부가 끝난 뒤 로키는 뉴욕의 평범한 피자가게 아저씨로 조용히 삶을 마쳤다. 깊은 신앙심을 갖고.
영화 ‘상처뿐인 영광’은 제목과 달랐다. 상처 없이 영광만 이어졌다. 감독은 아카데미상을 받고, 그 영화를 통해 데뷔한 폴 뉴먼은 일약 청춘스타가 되었다. 20년 뒤 그 영화는 실베스터 스탤론 주연의 ‘로키’로 거듭났다.
‘상처뿐인 영광’에 해당하는 서양의 고사성어는 피루스의 승리(Pyrrhic victory)다. 피루스는 오늘날 그리스 서북부의 에피루스라는 작은 지역의 왕이었다. 그는 자신의 먼 조상이 아킬레스와 알렉산더라는 자부심을 갖고, 자기도 대제국을 만들겠다는 야망을 품었다. 그래서 바다를 건너 이탈리아 반도까지 가서 로마제국과 맞붙었다. 두 번의 전투에서 피루스는 모든 것을 몽땅 쏟아부어 승리를 거뒀다.
하지만 가까운 친구와 역전노장, 그리고 엘리트 병사들을 전부 잃었다. 자기도 깊은 부상을 입고 그리스로 돌아갔다. 몇 년 뒤 그가 죽자 그의 왕국은 지리멸렬하다가 결국 로마의 속국이 되었다(기원전 167년). 모든 것을 다 바친 한때의 승리가 제 명을 단축시킨 것이다.
적에게 한바탕 맹공을 퍼붓는 것은 전쟁의 궁극적 목표가 아니다. 굳이 전쟁이 아니더라도 마찬가지다. 어떤 일을 할 때는 희생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따져봐야 한다. 경제학은 그것을 기회비용이라고 가르친다.
기회비용을 생각지 않으면, 실수하기 쉽다. 며칠 전 끝난 유럽 정상회담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 유럽의 정상들은 코로나19 위기극복을 위한 7,500억유로 규모의 기금을 마련하는 방안을 협의했다. 그런데 네덜란드와 오스트리아가 반대했다. 코로나19의 직격탄을 맞은 남유럽 국가들에 공짜로 보조금을 주는 대신 이자를 받고 대출할 것을 고집했다.
나흘이나 계속된 회의 끝에 보조금은 줄이고 반대국들의 EU 분담금을 조금 깎아 주는 조건으로 합의를 이뤘다. 그러나 대가는 컸다. 이제 네덜란드와 오스트리아에는 구두쇠라는 낙인이 깊게 찍혔다. 서양 언론들은, 이들이 약간의 돈을 위해 세상인심을 잃은 것을 두고 피루스의 승리라고 전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선수에게 메달이 최고의 가치가 아니다”고 지적했다. 마찬가지로 국가에 돈이 최고의 가치는 아니다. 기회비용을 망각한 메달과 돈은 상처뿐인 영광에 지나지 않는다. 아마 '저 높이 계신 분'도 메달과 돈보다는 개인의 행복과 상부상조를 더 좋아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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