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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수려는 자, 지키려는 자... 그들이 동상에 집착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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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상 철거하라고 사람들이 계속 몰려드는데,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지난달 29일 오전 인천 중구 자유공원 내 자리 잡은 맥아더 장군 동상 앞에서 만난 김모(78)씨는 연신 혀를 차며 말했다. 10년 가까이 맥아더 동상 철거 시위를 지켜본 김씨는 시위하는 사람들을 못마땅해 했다. 김씨는 “6ㆍ25전쟁을 겪었을 법한 사람들까지 동상 철거 시위를 하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며 “맥아더 장군 덕에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살아가고 있는 걸 감사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시위가 거세질수록 동상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는 말도 덧붙였다.
맥아더는 한참 전 세상을 등진 이방인이지만, 그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동상은 지금 철거하려는 자와 지키려는 사람들의 대결의 장으로 변했다. 맥아더 동상이 건립된 1957년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이 같은 갈등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동상 건립문에는 김씨가 강조한 대목이 보다 구체적으로 나와 있다. ‘1950년 9월 15일 장군의 진두지휘 하에 자유의 승리와 민국의 구원을 가져왔으니 이것은 영원히 기념할 일이며 이것은 영원히 기념할 사람인 것이다.’
맥아더 동상은 2000년대 초부터 줄곧 철거 논란에 휩싸였다. 2002년 효순ㆍ미선이가 미군 장갑차에 치여 사망하자 반미 감정이 고조됐고, 이후 맥아더 장군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졌다. 지난해 반미성향 단체인 평화협정운동본부는 두 차례 맥아더 동상 화형식을 벌였다. 이 단체는 지난 7월 1일에도 맥아더 동상 앞에서 철거 요구 기자회견을 가졌다. 지창영 집행위원장은 “전쟁이 일어난 건 분단이 됐기 때문인데, 분단의 원흉이 바로 미국”이라며 “그런 나라를 은인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이처럼 맥아더 동상을 지키려는 자와 철거하려는 측의 입장은 극과극이다. 마치 물과 기름 같아서 한 하늘 아래 살 수 없는 사람들 같다. 동상을 두고 벌어지는 갈등은 맥아더 장군만의 문제는 아니다. 지난 6월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단체 소속 대학생들은 평화의 소녀상 철거를 요구하는 보수단체에 맞서 소녀상과 자신들의 몸을 끈으로 묶은 채 소녀상 사수 집회를 벌였다. 최근에는 강원 평창군 민간 식물원에 소녀상 앞에서 무릎을 꿇은 남성 동상이 설치돼 논란이 일기도 했다. 해당 남성이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를 표현한 인물로 추정되자 한일 관계 악화를 우려하는 쪽에선 동상이 조속히 철거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기 때문이다.
동상 철거 논란은 비단 국내에 국한된 일은 아니다. 해외에선 주로 인종차별 관련 인물이 도마 위에 오른다. 프랑스에선 루이 14세 때 재무장관이었던 장 바티스트 콜베르의 동상을 철거하라는 목소리가 높다. 식민지에서 노예를 통치하는 노예법의 기초를 확립한 인물이라 기념할 필요가 없다는 이유에서다. 물론 철거 여부를 두고는 항상 찬반이 엇갈린다. 한쪽에선 동상을 지키려고, 다른 한쪽에선 동상을 철거하려고 혈안이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최근 “인종을 포함한 모든 차별에는 반대하지만, 어떤 동상도 철거하진 않겠다”고 말했다. 살아 움직이는 것도 아닌 화석화된 물체에 사람들은 왜 이토록 집착하는 것일까.
동상(銅像)은 사람이나 동물의 형상으로 만든 기념물을 말한다. 주로 기념할 만한 역사적 인물이 대상이 된다. 인간이 동상에 집착하는 이유는 그 속에 인간의 욕망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동상을 세우려는 이들은 동상을 통해 후대가 계속해서 특정 인물을 그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기억하길 바란다. 동상을 오랜 기간 연구해 온 조은정 미술평론가(고려대 디자인조형학부 초빙교수)는 “추상적 개념이 가시화했을 때 사람들은 눈앞에 나타난 것을 진실로 믿어 버린다. 이미지는 사고를 지배하기 때문에 동상이 지니는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고 말했다. 동상을 통해 당대 사람들이 직접 만나 보지 못한 과거 인물을 경험하고, 그것을 실재하는 것으로 믿기 때문에 동상을 지키려는 자들과 철거하려는 사람들 모두 동상에 집착할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그렇다면 국내에는 어떤 동상이 많이 세워졌을까. 동상을 통해 당대 지도층 인사들과 일반 국민들의 역사 인식을 파악하기 위해, 한국일보는 서울을 비롯해 전국 8개 특별시ㆍ광역시가 관리하고 있는 동상 82점(울산ㆍ세종은 0개)을 전수조사했다. 조례에 따라 서울과 부산, 인천, 대구, 대전, 광주 등 지방자치단체가 소유하거나 관리하는 공공용지(시설)에 설치된 동상들로, 민간이 사유지에 건립한 동상들은 포함돼 있지 않다.
공공용지에 동상을 세우려는 법인이나 단체 또는 개인은 지자체 내에 설치된 심의위원회의 심의를 받아야 한다. 심의위는 국난 극복 및 국권수호에 대한 공헌도, 사회 발전에 대한 기여도, 시민 공감도 등에 따라 건립 여부를 결정하게 된다. 예컨대 서울시의 경우 7~12명 이내의 공무원, 전문가 등으로 구성된 공공미술위원회가 공공시설 내 동상 건립 여부를 심의하고 결정한다.
한국일보가 조사 대상인 동상 82점을 분석한 결과, 김구 선생, 유관순 열사, 안중근 의사 등 ‘독립운동’ 관련 인물이 26점으로 가장 많았다. 심용환 역사N교육연구소 소장은 “인물 동상은 원래 서양에서 영웅을 기릴 때 사용하던 방식”이라며 “국내에 동상이 본격적으로 세워진 시기가 근현대이기 때문에 자연스레 익숙한 근현대사 인물들이 많이 조명됐다”고 설명했다.
장군과 군인, 의병 등 ‘전쟁’과 관련된 인물도 18점이나 건립돼, 독립운동 다음으로 비중이 높았다. 전쟁 관련 동상은 특히 반공(反共)으로 장기집권을 합리화했던 박정희 정권(1963~1979년) 때 집중적으로(8점) 세워졌다. 한시준 단국대 사학과 교수는 이에 대해 “군인들이 정권을 잡았기 때문에 군인 중심 역사가 강조된 측면이 있다”고 분석했다. 심용환 소장도 “장군을 영웅화하는 동상을 세움으로써 반공을 강조하는 효과를 볼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 광화문광장의 상징물인 이순신 장군 동상은 대표적 사례다. 이 동상은 정부 주도의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에 의해 1968년 세웠고, 박정희 대통령이 제작비를 헌납했다. 조은정 교수는 "원래는 이곳에 4ㆍ19 기념탑을 세우려 했는데, 5ㆍ16 군사정변 이후 4ㆍ19혁명을 기념하는 것을 억압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당시 반공이 중요시됐기 때문에 국란 극복의 상징인 이순신 장군 동상이 이 자리에 놓이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독립운동과 전쟁 관련 동상을 제외하면 평화의 소녀상, 위안부 피해자 등 위안부 관련 동상이 6점이나 세워진 것을 주목할 만하다. 위안부 피해자 관련 동상은 최근 5년 사이 집중적으로 우리 눈앞에 등장해, 동상의 힘을 느끼게 했다. 조은정 교수는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일본군 위안부를 비하하고 이 문제를 쉬쉬하던 때가 있었다. 진실을 알아가고 기억해야 한다는 분위기 속에서 소녀상이 잇달아 세워졌다. 소녀상은 어린 소녀들이 강제로 끌려간 사건이라는 점을 환기시키는 역할을 했다”고 언급했다.
기업인 동상은 삼성그룹 창업주인 고(故) 이병철 회장이 유일했다. 이병철 회장의 동상은 대구상공회의소가 이병철 회장 출생 100주년을 맞아 2010년 2월 옛 제일모직 자리인 대구오페라하우스 인근에 세웠다. 한때 '동상을 만지면 부자가 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관광명소로 부각되기도 했다.
분석 대상 동상 82점 가운데 남성은 65점으로 여성(11점)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다. 11점 중에서도 인물의 업적을 기릴 목적에서 세워진 동상은 독립운동가 유관순, 김마리아 열사, 김구 선생의 모친인 곽낙원 여사 정도다. 이는 여성이 조명되지 못했던 시대 분위기와 연관이 있다. 항일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신영숙 소장은 "같은 집안사람으로 똑같이 독립운동을 했는데도, 여성인 윤희순 의사의 동상은 후미진 곳에 있고 남성인 유인석 의병장의 동상은 시내에 있는 것을 보면, 여성들의 업적이 홀대 받는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며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희생적 투쟁 역시 제대로 기억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런 맥락에서 기념사업회는 '항일독립운동여성상'을 세우는 일을 하고 있다. 여성상에는 한복을 입은 옛 여성이 등불을 비추고, 오늘날의 교복을 입은 여성이 그 옆에서 독립선언서를 찍어 내는 모습이 담겨 있다. 여성상은 지난해 2월 서울 중구 배재어린이공원에 처음으로 등장했고, 같은 해 12월 충남 내포신도시 홍예공원에 건립된 데 이어, 이달 5일에는 배화여고에 세워졌다. 신영숙 소장은 "당대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정신이 오늘날 여성에게도 계승, 발전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형상화했다"고 설명했다.
누구의 동상인가만큼, 누가 그 동상을 만들었는지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동상엔 작가의 생각과 의도가 고스란히 녹아 들어, 동상을 지켜보는 사람들도 작가의 의식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1905년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고발하고자 자결한 충정공 민영환 동상의 경우 친일 작가인 윤효중이 만들었다. 조은정 교수는 “조각가가 어떤 역사의식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인물에 대한 해석이 달라지고 조각에도 반영된다”며 “민영환의 동상은 슬픈 얼굴을 하고 있는데, 작가의 패배적인 역사의식이 투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민영환 동상의 표정에서 나라를 지키지 못한 분한 마음보다 우울함이 느껴지는 것은 작가의 생각이 반영됐기 때문이란 설명이다.
위안부 피해자의 상징이 된 ‘평화의 소녀상’은 조각가 김운성ㆍ김서경 작가 부부가 만들었다. 부부는 언론 인터뷰에서 동상을 만들 때 소녀의 얼굴 표정을 크게 신경 썼다고 말했다. 어리지만 어리지 않게, 여리지만 당당한 의지를 표현하고, 순수한 소녀지만 살아온 역사와 미래가 보이는 얼굴을 표현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이다.
동상 제작 트렌드는 변화 중이다. 과거엔 정치적ㆍ교육적 목적으로 제작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최근엔 지방자치단체가 관광과 연계하기 위해 세우는 사례가 늘고 있다.
정부 주도의 대규모 동상 제작은 1966년 출범한 애국선열조상 건립위원회가 1972년까지 15명의 동상을 제작해 설치한 것이 전부다. 당시 애국선열조상건립위는 우리민족사상 불멸의 공적을 남긴 위인 및 열사들의 동상을 건립함으로써 그 정신을 길이 선양케 해 민족의 귀감으로 삼겠다는 목적에서 출범했다. 어떤 인물의 동상을 만들 것인가에 대해 각계각층의 의견이 수렴됐고, 그 결과 이순신 장군, 세종대왕, 사명대사 유정, 율곡 이이, 원효대사, 김유신 장군, 을지문덕 장군, 유관순 열사, 신사임당, 정몽주, 다산 정약용, 퇴계 이황, 강감찬 장군, 김대건, 윤봉길 의사 등의 동상이 세워졌다.
그 당시와 비교하면 현재 관광객 유치를 위한 동상 건립은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인천 중구가 차이나타운에 관우상 등을 설치한 것이 대표적이다. 이 외에도 강원 태백시는 2017년 드라마 ‘태양의 후예’ 촬영지였던 곳에 주인공들의 동상을 세웠고, 충북 청주시는 2015년 드라마 촬영지로 유명해진 수암골에 소지섭, 지진희, 구혜선 등 유명 배우들의 동상을 만들었다.
하지만 이 같은 동상 설치는 때때로 비판을 받기도 한다. 2016년 인천 동구가 관광 홍보 차원에서 송현터널에 설치한 어영대장 신정희의 동상은 일부 반발을 불렀다. 내세울 만한 업적이 있는 것도 아닌 데다, 주민들조차 잘 알지 못하는 인물의 동상을 세우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는 지적이었다. 신정희는 1878년 고종 황제의 명을 받고 화도진 포대를 축성한 인물이다. 동구는 매년 5월 화도진 축제를 열고 신정희 어영대장의 축성 행렬을 진행하고 있다.
같은 해 충북 음성군이 관광자원화를 위해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의 동상을 세운 것도 논란이 됐다. 일반적으로 동상은 죽은 사람 가운데 기념할 만한 역사적 인물을 대상으로 하지만, 반 전 총장은 살아 있는 인물인 데다 업적에 대한 평가 역시 정리됐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조은정 교수는 “지자체 입장에선 뭐라도 만들어 관광객을 유치하고 싶어 하는데, 최근엔 동상이 그 도구로 많이 활용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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