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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할까 고민하다 작업량에 질려버린 '봉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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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가 지난해 탄생 100년을 맞았습니다. 영화만큼 재미있는 한국영화 100년의 이야기를 영화전문가가 매주 토요일 <한국일보> 에서 들려드립니다. 한국일보>
봉준호 감독은 1969년 9월 14일 대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고 봉상균 전 영남대 교수는 서울대 회화과와 응용미술학과에서 공부한 후 문공부 산하 국립영화제작소에서 미술실장을 지내며 무대미술과 영화자막 서체의 디자인을 담당했다. 어머니 박소영씨는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과 ‘천변풍경’ 등으로 이름 높은 소설가 구보 박태원의 둘째 딸이었다. 형 봉준수씨는 서울대 영문과 교수, 누나 봉지희씨는 패션디자이너가 되었는데, 막내인 봉 감독이 영화감독의 길을 걷겠다고 하자 집안에선 말리기보다 “해보고 싶은 건 다 해보라”며 격려해주었다고 한다.
아버지의 서재를 드나들며 영화와 건축, 디자인에 관련한 다방면의 책을 접한 봉 감독은 일찌감치 시각예술의 중요성에 눈을 뜨게 된다. 그림에도 재능을 보여 만화가를 지망하기도 했는데 이는 대학 시절 교내신문 연세춘추에 만평을 연재하는데 그치지 않고, 감독이 되어서도 직접 스토리보드를 그려 영화의 모든 장면을 철저히 사전 시각화하는 작업 방식으로 이어진다. 중학생 시절 영화잡지 스크린을 모으며 영화에 관한 관심을 키웠던 그는 점점 재미를 넘어 진지하게 영화를 탐구하는 시네필로 변화하게 된다.
“(MBC) ‘주말의 명화’를 통해 대중적인 할리우드 영화를 봤다면, 일요일 낮 시간 EBS에서는 (이탈리아의 페데리코) 펠리니나 (프랑스의 프랑수아) 트뤼포 같은 감독들의 유럽 예술영화를 접할 수 있었다. 아마도 요즘 ‘실버 영화관’과 비슷한 프로그램일 텐데 당시 수첩이나 일기를 보니까 ‘오늘은 뭘 보았다’고 꼼꼼하게 적었더라.(웃음) AFKN도 빼놓을 수 없다. 식구들이 모두 잠든 금요일 미드나이트 시간에 존 카펜터나 브라이언 드 팔마의 B급 무비들을 볼 수 있어서 좋았고, 가끔 운 좋게 가슴 노출 장면도 나오면 정말 대박이었다.(웃음)‘ (봉준호 글, 주성철 엮음 ‘데뷔의 순간’)
영화 못지않게 봉 감독에게 영감을 준 건 TV였다. ‘살인의 추억’(2003)에서 송강호가 자장면을 먹으며 취조실에서 드라마 ‘수사반장’을 보는 장면은 드라마와 친숙했던 개인적 경험이 투영된 장면이었다. 그의 영화에 단골로 출연하는 원로배우 변희봉은 ‘수사반장’에서 사이비 교주나 사기꾼 등 악역을 전담했고 사극 ‘조선왕조 500년’에서 유자광 역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2000)의 경비원 역을 제안하면서 봉 감독은 오랜 팬이었음을 밝혔고, 처음엔 거절할 작정이었던 변희봉은 이에 설득 당했다. 그렇게 시작된 두 사람의 인연은 ‘살인의 추억’과 ‘괴물’(2006)을 거쳐 ‘옥자’(2017)로 이어진다. ‘마더’(2009)에서 김혜자의 캐스팅 또한 미니시리즈 ‘여(女)’에서 유괴한 아기를 친딸처럼 키우다 버림받자 미쳐버리는 어머니를 연기한 모습이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연극영화과 진학을 망설였던 봉 감독은 이장호, 배창호 감독도 영화과 출신이 아니라는 걸 알고 나서는 연세대 사회학과에 88학번으로 진학한다. 교내 영화동아리 활동을 통해 ‘지옥의 묵시록’(1979), ‘양철북’(1979) 등과 같은 고전명작들을 섭렵하는가 하면, ‘영화공간 1895’에서 영화평론가 정성일, 김지석, 전양준, 주진숙 등이 강사로 있던 ‘24시간 영화학교’의 수업을 신청해 복사된 원서들을 번역하며 영화 공부의 토대를 다져나갔다.
군 제대 후 1993년 복학한 봉 감독은 뜻 맞는 영화광 지인들을 모아 홍익대 근처 경서빌딩 2층에 대학 영화동아리의 연합체인 영화연구소 노란문을 결성한다. 동아리 이름은 사무실 출입문을 노란색 페인트칠을 했기 때문에 즉흥적으로 지은 것이었다고 한다. 단편영화 ‘백색인’(1993) 이전 봉 감독의 첫 작품은 ‘룩킹 포 파라다이스’라는 20분 분량의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으로 고릴라 인형을 조금씩 움직여 한 프레임씩 캠코더로 ‘콤마 촬영’했다고 한다. ‘실사를 할까, 애니메이션을 할까’를 고민하던 봉 감독은 ‘힘들게 사흘 동안 촬영했는데 돌리면 10초 밖에 안 나오는‘ 작업 속도에 질려버려서 애니메이션의 꿈을 깔끔히 접게 된다.
영화에 뜻있는 학생들이 몰려 제법 규모 있는 모임이 된 노란문은 연세대 대강당을 빌려 소규모 영화제를 열거나, 8㎜ 카메라로 단편영화를 실습하는 등 전방위적인 활동을 펼쳤다. 3년 간 노란문에 몸 담은 봉 감독은 회원들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첫 실사영화인 16㎜ 단편 ‘백색인’을 만들었고, 이 습작을 포트폴리오 삼아 영화아카데미 11기로 들어가게 된다. ‘지구를 지켜라’(2003), ‘1987’(2017)의 장준환 감독이 동기로 봉 감독은 장 감독의 단편 ‘2001 이매진’(1994)에 촬영감독을 맡기도 한다.
‘플란다스의 개’의 메가폰을 쥐기까지 보낸 4년 2개월은 방황과 좌절의 연속이었다. 졸업작품 ‘지리멸렬’(1994)로 1995년 벤쿠버국제영화제에 초청되는 개가를 올렸지만,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1995)의 연출부에 들어가려다 지원이 늦어 기회를 놓쳤고, ‘꽃잎’(1996) 때는 면접에서 떨어지는 등 충무로에 진입하기가 쉽지 않았다. ‘박리다매’라는 각본 팀을 꾸리고 있던 박찬욱 감독에게서 범죄물 ‘부자유친’(이무영 감독의 ‘휴머니스트’(2001)로 완성된다)의 시놉시스를 받고 각본을 집필했지만 장편으로서의 구조를 갖추는데 실패했고, 이준익 감독이 제작자로 나선 로맨틱 코미디 ‘오늘 꼭 죽어야지’는 6개월 정도 제작을 추진하다가 무산되었으며, 영화아카데미 선배인 박종원감독이 구상하던 블랙코미디 ‘김대중 죽이기’ 때는 시놉시스 작업에 참여했지만 기획 자체가 엎어지고 만다.
옴니버스영화 ‘맥주가 애인보다 좋은 이유’(1996)의 연출부로 충무로 신고식을 마친 봉 감독은 동기 장 감독과 함께 차승재 대표의 우노필름에 들어간다. ‘모텔 선인장’(1997)의 조감독을 거쳐 ‘유령’(1999)의 시나리오를 개발하며 착실히 데뷔를 준비하던 그는 우노필름이 싸이더스로 상호를 바꾼 해 ‘플란다스의 개’로 감독 데뷔를 한다. 그러나 “사소한 일상적인 얘기로도 강렬한 장편영화를 찍을 수 있음을 보여주겠다”는 포부를 품고 만든 첫 장편은 전국 관객 12만명으로 흥행에서 바닥을 찍으며 망했고 비평적으로도 무관심 속에 묻혔다. 동료이자 친구인 류승완 감독이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2000)로 일약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각광받은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인 결과였다.
차 대표는 두 번째 영화도 싸이더스에서 같이하자는 제안을 던졌다. 이에 봉준호는 진지한 웰메이드 영화를 만들기로 작심하고 화성연쇄살인사건의 실화를 다룬 ‘살인의 추억’에 돌입한다. ‘범인이 잡히지 않는 스릴러’라는 태생적인 약점으로 시나리오 단계에서부터 주변의 우려를 받았던 이 영화는 최종 편집본이 나온 막바지에 투자가 철회되는 등의 난관에 부딪쳤다. 그러나 1980년대 한국사회의 광기와 어둠을 조명한 ‘살인의 추억’은 흥행몰이에 성공했고, 제40회 대종상 최우수작품상과 감독상을 휩쓰는 기염을 토했다. 청년감독 봉준호의 앞길이 맑아지는 조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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