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트는 미학적 파산을 면할 수 있을까

입력
2020.07.24 04: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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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가수 주현미는 유튜브 채널 '주현미TV'를 통해 옛 가요를 복원하며 성인 가요의 마학적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사진은 SBS '트롯신이 떴다' 출연 장면. SBS 제공

가수 주현미는 유튜브 채널 '주현미TV'를 통해 옛 가요를 복원하며 성인 가요의 마학적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사진은 SBS '트롯신이 떴다' 출연 장면. SBS 제공


‘한국 성인 가요는 미학적으로 파산한지 오래 됐다.’

얼마 전 대중음악 기획자이자 뛰어난 작사가인 이주엽 JNH뮤직 대표가 본보에 쓴 칼럼을 두고 음악 관계자들 사이에서 잠시 찬반논쟁이 있었다. 대중음악이 꼭 미학적 성취를 이뤄야 하는지, 미학적 가치에 대한 판단은 어떤 기준으로 누가 할 수 있는지 반론이 있었고, 다시 그에 대한 반론이 이어졌다. 격렬한 토론을 기대했지만 논쟁은 미지근한 몇 개의 의견 나열로 끝이 났다.

성인 가요와 트로트를 동의어로 친다면 나는 대체로 이 대표의 관점에 어느 정도 동의하는 편이다. 치열한 고민을 거쳐 음악을 만들어내는 일부 창작자의 노력을 무시하려는 건 아니지만, 기계적으로 찍어낸 듯 무성의하고 개성 없는 음악이 너무 많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다. 물론 대중을 위한 음악이 반드시 예술적 완성도까지 갖출 필요는 없다. 하지만 다수가 즐기는 음악이라고 해서 미학적 가치를 포기할 이유도 없다. 대중의 취향은 아주 다양하고, 그런 다양한 취향을 만족시키는 상품이 고루 존재해야 음악 산업도 우리의 삶도 풍요로워지기 때문이다.

TV조선의 ‘미스터트롯’이 기록적인 시청률을 올릴 수 있었던 건 단지 ‘음악의 예능화’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트로트 세계가 얼마나 풍요로울 수 있는지 보여줘서다. ‘미스터트롯’ 출연진의 팬들을 취재하며 놀란 점이 하나 있는데 기존 트로트 애호가뿐 아니라 이전에 트로트를 전혀 듣지 않았던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아이돌 그룹의 현란한 댄스 곡만 듣던 20대도, 이문세와 신승훈을 즐겨 듣던 50대도 “트로트가 이렇게 좋을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고 입을 모았다. 10대 자녀와 40대 부모가, 30대 자녀와 60대 부모가 같은 노래를 들으며 공감하고 소통하는 드문 경험을 했다는 이야기도 여러 번 들었다. 수요가 이토록 넘칠 만큼 차올라 있었는데 왜 공급이 없었던 걸까.

트로트의 미학적 파산 사유를 창작자의 관성적 직무유기 탓으로만 돌릴 순 없다. 오랜 기간 미디어의 엘리트주의와 청년 중심 문화에 억압된 결과이기도 하다. 언론고시를 뚫고 방송사에 입사한 명문대 출신 PD들에게 트로트는 늘 찬밥 신세였다. 주류 매체에서 밀려난 트로트는 지역 행사와 고속도로 휴게소로 내몰렸다. CD(가 부록으로 담긴 쿠폰 겸 화보집)와 스트리밍 음원, 방송ㆍSNS 노출 중심으로 음악 시장이 재편되다 보니 음악 관련 차트에서 트로트 음악은 대부분 집계 불가 상품이 됐다. 일상적으로 광범위하게 소비되는 음악인데도 차트에선 보이지 않는다니 얼마나 불공정한 일인가.

그렇다고 비관할 수준까진 아니다. 미디어는 투항했다. 트로트의 미학적 가능성도 여기저기서 발견된다. 임영웅이 ‘미스터트롯’에서 부른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나 주현미가 SBS ‘트롯신이 떴다’에서 부른 ‘어느 멋진 날’ 같은 곡은 트로트와 발라드, K팝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성인 가요가 보여줄 수 있는 품격을 예증한다.

최근 트로트가 방송가의 대세가 된 ‘기현상’은 엘리트 문화에 대한 반엘리트주의의 반격처럼 보인다. 대중의 실제 취향을 온전히 반영하지 못하는 음악 시장 플레이어들에 대한 소비자주의의 반격일 수도 있겠다. 트로트 창작자와 제작자에게 지금은 더할 나위 없는 기회이자 엄중한 시험대다. 이젠 미디어의 홀대만 탓할 수도 없다. 성인 가요가, 트로트가 미학적으로 파산하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는 것도 결국은 음악가들의 몫이다.

고경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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