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진보가 내일의 보수다

입력
2020.07.20 15:22

16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대학가·청년 서명운동 기자회견. 연합뉴스


모두가 마스크를 쓰고 다닌다. 답답하다. 이 더위에 더 고역이다. 그래도 나를 위해 그리고 타인을 위해 써야 한다. 젊은 연인들에게는 마스크가 더 아쉽고 답답할 것이다. 지하철 에스컬레이터에서 마스크를 쓴 채 가볍게 뽀뽀하는 연인들이 귀엽고 조금은 안쓰럽게 보였다. 사람마다 느낌이 다르겠지만 나는 젊은 연인들이 가볍게 키스하는 게 예뻐 보인다. 이제는 일상적인 일이지만 불과 20년쯤 전만 해도 사람들이 눈을 흘겼다. 심지어 7,80년대에는 경범죄로 처벌되기도 했다. 지금 젊은 연인들이 그 말 들으면 깔깔 웃겠지만. 모든 게 처음에는 낯설고 불편한 법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받아들이는 폭이 커지면 자연스러운 일로 여겨진다. 경범죄로 처벌하던 그때도 외국에서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외국영화를 보는 한국인들이 그걸 망측하다 여기지 않았다. 그런데 자국에서 그런 일을 보면 혀를 차고 야단쳤다. 마치 그게 우리의 미풍양속을 지키는 사명인 듯. 웃기는 일이었다.

1913년 6월, 여성참정권 운동가 에밀리 데이비슨은 런던 교외 엡섬다운스 더비에 출전한 국왕 조지 5세의 경주마가 결승점으로 질주하던 순간 몸을 던져 숨졌다. 그녀는 자신의 목숨을 던져 국왕에게 여성참정권을 외쳤다. 이후 성의 불평등이야말로 인류의 진보를 가로막는 최대의 적이라고 주장한 에멀린 팽크허스트 등 많은 여성들의 투쟁이 이어졌고 마침내 1918년 2월, 30세 이상의 여성에게 참정권이 부여되었다. 여성이 정치에 참여하면 남성의 권위와 권력에 위협이 될 것이라는 두려움도 사라졌다. 뉴질랜드 10달러 지폐에 있는 얼굴의 주인공은 여성운동가 캐서린 셰퍼드다. 여성에게 가장 먼저 선거권을 보장한 뉴질랜드답다. 정작 프랑스혁명을 이끌었던 프랑스에서 여성참정권을 인정한 것은 1946년이었고 스위스는 무려 1971년에야 여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했다.

1955년 12월, 미국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시에서 백인 승객에게 자리 양보하라는 버스 기사의 지시를 거부한 로자 파크스가 경찰에 체포되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분노했고 382일 동안 버스 승차를 거부했다. 그녀는 직장을 잃었고 남편도 직장을 그만둬야 했다. 그러나 로자 파크스는 타협하지 않고 이 사건을 알리기 위해 각지를 돌며 연설했다. 버스 보이콧은 인종 분리에 저항하는 큰 규모로 번졌고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참여로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인권과 권익을 개선하라는 미국 시민권 운동으로 확장되었다. 많은 백인들도 그들을 응원했다. 그리고 마침내 승리했다. 1990년 로자 파크스는 미 행정부가 헌정할 수 있는 최고 예우인 대통령자유메달을 받았고 2005년 사망했을 때 여성으로는 처음으로(흑인으로는 두 번째) 미국 의회 캐피탈 힐에 안장되었다. 그녀를 ‘건방진 흑인 여자’로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와 평등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절대적 가치는 결코 그냥 주어진 게 아니다. 수많은 이들이 피 흘리고 싸웠으며 편견과 왜곡을 이겨낸 결과물이다. 그들은 그 시대에 예외 없이 ‘위험하고 분수를 모르는’ 부적격자거나 과격한 진보주의자로 따돌림을 당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의 외침과 투쟁이 옳다는 것이 증명되었고 세상은 그들의 주장을 따라 변화했다. 어제의 급진은 오늘의 진보, 오늘의 진보는 내일의 보수가 된다.

2007년 이후 세 차례에 걸쳐 입법이 시도됐지만 회기 종료와 함께 폐기되었던 차별금지법으로 다시 시끄럽다. 동성애를 옹호하는 법이라며 기독교 보수 세력의 반대가 거세다. 다른 나라들은 이미 그 문제에 사회적 합의를 이루고 있는데. 시간이 흐른 뒤 그 반대가 시대착오였다고 한탄할지 모른다. 그때 가서 발뺌하면 그뿐일까? 자위가 죄악이라고 가르쳤던 교회지만 지금은 그런 멍청한 말 하지 않는다. 미국 교회에서 노예 유지를 위해 흑인에게는 영혼이 없다고 선언했던 시절을 기억하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미국 침례교는 그 어리석음을 깨뜨리고 미국에서 크게 성장했다. 성숙한 보수라면 역사의 흐름을 읽어야 한다. 무조건 반대와 거부가 능사가 아니다. 아직도 젊은 연인들의 키스가 보기 싫은가? 외국 연인들은 괜찮고? 퀴어축제에서 축복기도했다고 목사직 정직시키는 난센스가 부끄럽다.

김경집 인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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