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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치산의 아들, '서편제' '취화선'으로 세계에 우뚝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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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가 지난해 탄생 100년을 맞았습니다. 영화만큼 재미있는 한국영화 100년의 이야기를 영화전문가가 매주 토요일 <한국일보> 에서 들려드립니다. 한국일보>
임권택 감독은 1934년 전라남도의 장성읍 단광리에서 3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작은 지주 집안의 손자로 국민학교 3학년 때 광복을 맞은 그의 인생은 해방정국의 혼란과 6ㆍ25전쟁을 거치면서 산산조각 나고 만다.
경성 제2고등보통학교를 다녔던 아버지, 일본 유학을 다녀온 외삼촌은 좌익 운동의 영향을 받아 지리산 빨치산에 들어갔고, 집안은 경찰의 감시와 통제를 받게 되었다. 마을은 삽시간에 좌와 우로 갈라졌고 ‘빨치산을 잡아다가 국민학교 바로 옆 냇가에다 놓고 공개처형을 시키면서 애들 와서 구경하’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건강이 악화된 아버지는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산을 내려와 자수했지만, 형사들이 일본도를 들고 집에 들이닥쳐 남은 친척의 행방을 대라고 협박하는 일을 수시로 겪어야 했다.
“형무소에서 죽은 배다른 삼촌, 전쟁으로 고모부들도 다 죽었고, 고모도 빨치산에 가담했다고 잡혀서 평생 어디론가 굴러다니다가 죽었고... 외가, 가운데 할아버지, 전부 다 참으로 작살이 났으니까.”(정성일, 임권택 인터뷰집 ‘임권택, 임권택을 말하다.)
남은 땅을 팔아야 생활이 될 정도로 가세는 기울었고, 빨치산 피해자 가족의 분풀이로 소년은 뒷산으로 끌려가 뭇매를 맞곤 했다. 광주숭일고등학교를 중퇴한 18세의 임 감독은 맨몸으로 가출해 부산으로 떠났다. 호남에서 영남을 관통하는 긴 여정. ‘만다라’(1981)에서 ‘개벽’(1991)과 ‘서편제’(1993)를 거쳐 ‘취화선’(2002)까지 일관되는, 정처 없이 방황하는 인간과 길 위의 풍경을 관조하는 정서는 이 무렵부터 싹트기 시작했다.
임시수도 부산에 도착한 임 감독은 사흘을 굶으며 가판대에서 잠을 청했고 생존을 위해 막노동판을 전전했다. 고된 일을 마치고 돌아온 새벽에는 온 몸의 통증으로 울면서 잠을 이루지 못했고, 노동의 힘겨움을 술로 달래는 나날이 반복되면서 수전증이 오기도 했다. 부산에서 보낸 2년이 가장 처절하고 불행한 시기였다고 그는 회고한다.
영도다리 근처에서 미군이 남기고 간 군화를 고쳐 팔던 임 감독은 곧 인생의 전기를 맞게 된다. 이규환 감독의 ‘춘향전’(1955)이 공전의 흥행을 기록하면서 영화 산업이 돈이 된다는 인식이 퍼지자, 군화 물량을 대주던 상인들이 영화판으로 몰려들어 제작사를 차린 것이다.
국제시장에서 노점을 운영했지만 장사 수완이 없었던 임 감독은 영화사의 연락을 받고는 서울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정창화 감독의 ‘장화홍련전’(1956)에서 소품담당을 한 것이 임 감독의 첫 영화 경력이었다. 이때까지 영화에 관한 경험이라곤 무성영화를 단편적으로 접해본 것 말고는 없었고, 작품을 만든다는 의식보다는 생계를 해결해야 한다는 절박함이 강했다.
통행금지가 오전 네 시까지였던 시절, 말단 스태프이었던 임 감독은 오전 다섯 시부터 영화사에 나와서 묵묵히 일했다. 밤낮없이 일에 매진하는 성실함을 눈여겨본 정 감독은 심부름꾼으로 부리던 임 감독을 연출부 막내를 거쳐 ‘비련의 섬’(1958) 즈음에는 조감독으로 차근히 승진시키는 한편으론 장래를 위해 독서를 할 것을 권유하기도 했다. 조언에 따라 임 감독은 당시 출간된 대중 소설 상당수를 독파했는데, 그렇게 축적한 독서량은 감독 입봉 후 10년간 쉼 없이 50여편 넘는 장르물을 소화하는 밑천이 된다.
당대의 스타 배우 김삼화의 뺨을 때리는 대형사고를 친 것도 이 시기의 일이었다. 안영촬영소에서 세트 촬영 중 정 감독과 불화 중이던 김삼화는 동료배우와 스태프의 거듭된 간청과 설득에도 응하지 않고 분장실에 틀어박혔는데, 한 사람의 고집으로 현장 전체가 마비되어 버린 데 격분한 임 감독은 ‘어차피 연출부 막내이니 뺨 한번 때리고 영화 일은 그만두면 된다’는 심사로 일을 저질러버렸다. 김삼화는 그 길로 바로 서울로 돌아가 버렸고, 이 사건은 임 감독과 제작부장이 김삼화를 찾아가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며 뺨을 석대씩 맞는 벌을 받고서야 수습되었다고 한다.
도제 생활로 잔뼈가 굵은 임 감독은 한흥영화사에서 독립군의 활약상을 그린 액션활극 ‘두만강아 잘 있거라’(1962)로 데뷔한다. “5백여 스키여(스키어)를 동원했고, 5만 여발의 뇌관을 소비하는 등, 폭발사고로 엑스트라들의 치료비만 해도 1백만환이 넘었다는 화제의 영화”(조선일보 1962년 1월 18일자)는 설 연휴에 개봉해 서울 관객만 9만명을 동원하는 기염을 토한다.
이후 임 감독의 경력은 ‘월하의 검’(1970), ‘삼국대협’(1972) 같은 무협영화, 권투를 다룬 스포츠 영화 ‘나는 왕이다’(1966), 사극 ‘요화 장희빈’(1968), ‘욕망의 결산’(1964)에서 ‘돌아온 자와 떠나야 할 자’(1972)에 이르는 액션물, ‘전쟁과 여교사’(1966), “바람같은 사나이’(1968)를 경유해 ‘증언’(1973)으로 이어지는 반공 기조의 전쟁영화, 한국 최초의 3D 영화 ‘몽녀’(1968) 등, 일일이 다 열거하기 어려울 만큼 다양한 장르의 영화로 점철된다. 한 해에 7~8편을 찍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언젠가 제가 텔레비전을 틀었더니 1960년대에 만들어진 저질 영화가 방영이 되고 있더라고요. 처음 보는 것도 같고, 한번 봤던 영화 같기도 했는데 끝나고 엔딩 스크롤이 올라가는 것을 보니 제가 연출한 작품이었어요. 10여 년 동안 50여 작품을 삶에 대한 고민 없이 찍어왔기 때문에, 그 당시의 영화들을 제 안에서 애써 지우려고 했던 연유도 있었겠지만 너무 많이, 그것도 한꺼번에 찍어낸 것이어서 다 기억할 수가 없더군요.” (임 감독 발언, 네이버 인생스토리 ‘한국 영화계의 거장, 임권택’)
이 시기의 임 감독은 검열과 시장의 필요에 순응해 통속물을 다작하던 고용감독의 신세였다. ‘밤차로 온 사나이’(1970), ‘원한의 거리에 눈이 나린다’(1971)처럼 숙련된 장인의 면모가 발휘된 수작도 있었지만, 예술가의 자의식이 반영될 여지가 없었던 그 무렵의 영화들을 두고 뒷날 그는 ‘습작’에 지나지 않는다고 단호하게 부정한다. 구태의연한 상업영화 대신, ‘한국 사람이 아니면 만들 수 없는 우리만의 영화’, ‘한국 사람들이 살아낸 수난의 세월이나 삶, 그리고 우리가 가진 문화적 개성들’을 담아낸 영화를 만들어야겠다는 진지한 자기 반성과 열정이 서서히 그의 가슴을 채워가고 있었다.
제작을 겸한 첫 영화 ‘잡초’(1973)는 그러한 결심의 산물이었다. 한 여인의 기구한 인생사를 그린 이 영화는 흥행에 완전히 실패했으나, 이어서 발표한 ‘왕십리’(1976)와 ‘족보’(1978), ‘깃발 없는 기수’(1979)는 임 감독을 둘러싼 세간의 평가를 바꿔놓았다.
‘신궁’(1979)으로 정일성 촬영감독, ‘짝코’(1980)를 통해 송길한 작가와 손잡게 되면서 임 감독은 1980년대 한국영화의 빛나는 성취들을 일구어나갔다. 그 중에서도 “내 영화 일생에서 가장 적극성을” 보였던 작품 ‘만다라’(1981)는 제32회 베를린국제영화제 파노라마 부문에 초청되었고, 훗날 ‘한국영화와 임권택’을 쓰게 되는 일본의 영화평론가 사토 다다오는 마닐라영화제에서 이 영화를 보고 ‘걸작을 만났다’고 평했다.
가부장적 질서에 의해 희생되는 여성상을 다룬 ‘씨받이’(1986)는 주연 강수연에겐 제44회 베니스 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임감독에게는 제34회 아시아 태평양 영화제 최우수 작품상과 감독상을 안기면서, 세계영화계의 관심 바깥에 있었던 한국영화의 위상을 새로이 정립하는데 기여하게 된다.
한국영화가 세대교체의 격변을 맞는 와중에도 임감독은 자신의 중심을 잃지 않고 현역 노장으로 작품 활동을 이어나갔다. 역사가 남긴 상처를 품고 살아가는 인간을 조명한 ‘짝코’와 ‘길소뜸’의 관심은 ‘태백산맥’(1994)과 ‘하류인생’(2004), 주변부로 밀려난 삶을 다룬 ‘티켓’(1986)의 시선은 ‘노는 계집 창’(1997)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한국 전통의 미의식을 영화로 담고자 한 열망은 판소리를 소재로 한 ‘서편제’와 ‘춘향뎐’(1999)을 거쳐 화가 오원 장승업의 일대기를 그린 ‘취화선’이 제55회 칸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하면서 세계의 찬사를 받게 된다. 한국영화 반세기의 풍파를 견뎌낸 뿌리 깊은 거목(巨木)은 한국인의 역사와 정체성,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영화로 승화한 거장(巨匠)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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