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저 왔어요" 치매 노인의 '기억친구' 대학생 조영국씨

입력
2020.07.01 04:30
수정
2020.07.01 09:41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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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를 올바로 이해하고 주변의 치매환자와 가족을 보면 도움을 줄 수 있는 서울시 ‘기억친구’로 활동하는 조영국씨가 12일 오전 서울 중구에 위치한 한국일보 본사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정준희 인턴기자

치매를 올바로 이해하고 주변의 치매환자와 가족을 보면 도움을 줄 수 있는 서울시 ‘기억친구’로 활동하는 조영국씨가 12일 오전 서울 중구에 위치한 한국일보 본사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정준희 인턴기자


9시52분54초에 멈춰진 벽시계, 금붕어가 사라진 커다란 어항. 6년 전 당시 고등학생이던 조영국(23)씨가 마주한 최모 할머니의 지하 단칸방 풍경은 먹으로 그려낸 정물화 같았다. 두 번째, 세 번째 방문 때도 똑같았다. 3개월이 지난 후에야 시곗바늘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음식이 상한줄도 모르고 먹거나 화장실을 가다 쓰러져 잠을 잘 정도로 치매가 진행된 상태였어요. 게다가 혼자 살다보니 전혀 당신 주변을 돌보지 못했던 거죠."

그는 강동구 소재 선사고 2학년 재학 시절 교내 봉사동아리 '선사랑'에서 활동하면서 치매를 앓고 있는 할머니와 처음 만났다. 강동구치매지원센터에서 치매에 대한 교육을 받은 후 동급생 2명과 주말마다 할머니댁을 찾아 말벗 노릇을 했다. 이때 갖게된 치매노인에 대한 꾸준한 관심이 서울시에서 양성하는 치매노인의 '기억친구' 활동으로 이어졌다. 천만 시민이 모두 치매환자의 기억친구가 되는 것을 목표로 서울시가 2015년부터 진행 중인 프로젝트다.

조씨는 최근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기억친구’가 대단히 특별한 일을 하는 건 아니다"며 "치매를 올바로 이해하고 치매환자를 보면 자연스럽게 도움을 줄 수 있게 따뜻한 마음으로 다가가는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관련 교육을 받은 기억친구 15만여명이 현재 지역사회에서 '인간 지팡이'로 활동하고 있다.

나이 많은 치매환자들은 거꾸로 젊은이들의 인생 지팡이 역할도 했다. "만날 일 자체가 별로 없는 어르신과 세대를 뛰어넘는 소통을 어떻게 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기회도 됐습니다.”

그가 따뜻한 시선을 가질 수 있었던 건 고교 시절 '산 경험' 덕분이다. "우리 할머니였다면 뭘 함께 하면 좋을까" 고민 끝에 화투를 치면서 어색함을 없앴고, 되레 할머니로부터 점수 계산법을 배우기도 했다. 손자뻘 학생들과 마음을 나누면서 할머니 증세가 나아지는 걸 보는 것도 꽤나 보람찬 일이었다. 나중에는 극장 구경이나 올림픽공원 나들이 같은 외출도 가능해졌다. TV를 혼자 켜서 리모콘으로 채널을 돌려 깜짝 놀라게 만들기도 했다. “다음주엔 얼마나 재미있을지 기대될 정도였죠.”

노인 10명 중 1명이 앓는 치매는 흔한 병이다. 2030년 서울에서만 치매환자가 20만명을 넘어설 것으로 추정됐다. 조씨는 "치매는 내가, 우리 가족이 언제라도 겪을 수 있는 일"이라며 치매환자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당부했다.

할머니와의 만남은 그의 앞길에 큰 영향을 미쳤다. 대학에서 사회복지학 전공을 선택했다. “사회복지사가 돼서 복지사각지대에서 고독사나 자살이 없는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하고 싶습니다.”

권영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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