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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오늘도 범죄 소설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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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복잡할 때 범죄 소설을 읽는다. 손에 쥐고 있는 내내 적당한 긴장감을 느낄 수 있고, 종국엔 모든 궁금증이 깔끔하게 풀려 기분 좋게 책장을 덮을 수 있다. 예외적인 경우도 없지 않지만, 대개의 경우 권선징악이 실현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도 선택의 이유다.
추리 소설이 더 익숙한 표현이던 시절에도 그랬다. 당시엔 코난 도일과 애거서 크리스티, 엘러리 퀸처럼 고전 반열에 오른 추리 소설을 읽었다. 당대 최고의 작가들이 짜놓은 덫에 빠져 허우적대는 경험이 그렇게 좋았다. 읽는 내내 누가 범인일지 아무리 머리를 굴려 보아도, 결국엔 작가가 준비한 근사한 반전에 도달하기 전까진 헛다리만 짚기 일쑤였다. 책 속의 탐정들은 어찌나 예리하고 침착한지, 일반인이라면 허투루 흘려 보낼 증거들을 차곡차곡 쌓아 올려 놀라운 결말에 도달하는 과정이 그야말로 흥미진진했다. 셜록 홈즈나 에르큘 포와로, 드루리 레인 같은 독특한 결핍을 가진 캐릭터들이 범인을 색출해내는 과정에 몰입하다 보면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었다.
어린 나이에 읽기엔 잔인하고 거친 묘사가 많아서, 부모님들은 추리 소설 읽는 걸 권장하지 않았다. 책을 사려면 허락이 필요했던 시절이라, 그래서 1주일에 두 번씩 아파트 단지에 들르던 책 대여 차량을 손꼽아 기다렸다. 아파트 마당에 자리잡은 차량의 책꽂이 곳곳을 뒤적이던 기억이 벌써 20년도 훨씬 지난 일이다. 요즘은 아마 거의 만나기 힘든 풍경인 것 같다.
요즘 읽는 책들은 좀 더 현대적인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형사물 시리즈다. 리 차일드가 쓴 잭 리처 시리즈, 마이클 코넬리의 해리 보슈 시리즈에 시쳇말로 ‘꽂혔다’. 이제는 책 대여 차량을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 나이여서, 두 시리즈의 책들을 줄줄이 사다 틈틈이 읽는 게 요즘 몇 안 되는 취미 중 하나다.
두 시리즈에 등장하는 주인공 리처와 보슈는 ‘하드보일드’ 계열의 주인공으로 분류된다. 90년 전 출간된 ‘말타의 매’에 등장하는 탐정 샘 스페이드나 레이먼드 챈들러가 창조한 필립 말로로 대표되는 하드보일드 스타일 주인공들은 한마디로 자비가 없는 캐릭터다. 리처와 보슈는 나란히 참전 경험을 가진 군인 출신이며 고정된 파트너 없이 수사에 나선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하지만, 가족은커녕 손가방 하나 없는 맨손으로 정치없이 떠도는 리처와 달리, 로스앤젤레스 경찰(LA PD) 소속 형사인 보슈는 딸이 삶의 아주 중요한 부분인 보다 현실적 캐릭터다.
리처와 보슈는 21세기의 하드보일드 주인공답게 이 분야 선배 캐릭터들에 비하면 따뜻하고 배려심도 갖춘 사내들이다. 하지만 수사나 해결 과정에서 보여주는 냉혹한 면모는 범죄자를 색출하고 처단하는 과정에서 빠짐없이 발휘된다. 동정의 여지조차 없는 잔혹한 범죄자들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처리하는 모습은 책을 읽는 동안 마음에 남아있던 불편한 감정을 말끔하게 씻어낸다.
웬만한 범죄 소설에서도 다루지 않을만한 일들이 현실에서 잇달아 벌어지고 있다. 중범죄자들이 대부분 검거된다는 점에서 마음은 놓이지만, 그렇게 잡힌 가해자들이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않는 모습은 소설에서와 다른 답답함의 근원이다.
4년 전 출간된 ‘메이크 미’에서 잭 리처는 ‘다크 웹’을 통해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른 집단과 맞닥뜨린다. 그리곤 곧바로 그 중심부로 쳐들어가 자기만의 방식으로 무자비하게 응징한다. 물론 현실에선 불가능한 일이며 장려해서도 안 되는 행위다. 하지만, 때론 소설보다 현실이 더 끔찍한 법이다. 극악무도한 범죄자들에게 내려진 이해할 수 없이 가벼운 처벌, 그저 종이에 쓴 글씨일 뿐인 반성문이 양형의 사유가 되는 풍경은 그 자체로 그로테스크하다. 선정적인 보도와 일시적인 관심 뒤에 버려진 피해자들의 상처도 빼놓을 수 없다. 어쩌면 하드보일드 캐릭터가 필요한 것은 소설이 아닌 현실 그 자체인지도 모를 일이다.
서형욱 풋볼리스트 대표ㆍ축구해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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