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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세상보기] 용기는 어디에서 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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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의 나는 용감했다. 매일매일 쏟아지는 무수한 ‘처음’들을 기꺼이 온몸으로 부딪쳤기 때문이다. 첫 심부름, 첫 등교, 첫 친구, 첫 발치. 어린 내가 느끼기에도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처음인 것은 아주 많았고, 모든 처음들은 저마다 다른 양의 용기를 필요로 하는 도전이었다. 다행히도 어린 이슬이는 순식간에 용기를 내는 멋진 아이였다. 용기가 필요한 순간이면 그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면 마치 게임 속 주인공처럼 용기 게이지가 쭉쭉 차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용기가 든든하게 차오르면 ‘처음’에서 오는 두려움은 금방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었다.
그런데 그때 그렇게 넘치던 용기들은 다 어디로 가버린 걸까. 어른이 된 지금은 도전 앞에서 너무 오래, 그리고 자주 머뭇거린다. 눈을 감으면 용기가 샘솟는 대신 넘어야 할 장애물들만 아른거린다. 너무 늦은 것 같은 나이, 부족한 시간, 실패에 대한 불안함.
그럴 때면 재빨리 내가 아는 가장 용기 있는 한 사람을 떠올린다.
짧고 꼬불꼬불한 파마머리, 작은 키에 꼿꼿한 등, 몸집보다 더 큰 가방, 주름져 야들야들한 피부.
20대 초반 유럽여행을 할 때 혼자 배낭여행 중이던 71세 할머니를 만나 이틀을 동행한 적이 있다. 경기도에서 평범하게 농사지으며 살고 있다던 할머니는 막내아들이 장가를 간 7년 전부터 매년 추수가 끝난 가을, 홀로 여행을 떠난다고 했다. 노인회관에서 틈틈이 배운 인터넷 실력으로 정보를 찾아 여행계획을 짜서 짧게는 열흘, 길게는 한 달 동안 유럽을 여행 한다며 이번 여행을 위해 손수 만든 가이드북을 보여주었다. 양면이 손글씨로 빽빽한 A4용지 꾸러미였다. 할머니는 이것 잃어버리면 한국에 못 돌아간다고 허허 웃었다. 그는 여행하는 매 순간이 두렵다고 했다. 배낭을 꾸릴 때는 내가 이 짐을 다 지고 걸을 수 있을까 싶어 두렵고, 비행기 티켓을 끊을 때는 영어 까막눈인 내가 티켓을 제대로 끊은 건지 믿을 수 없어 두렵고, 첫 도시에 내릴 때는 배낭을 도둑맞을까 두렵고, 여행 중에는 기력이 다 해 연고도 없는 곳에서 죽을까 봐 두렵다고 했다. 그렇게 두려우면서도 여행을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자 할머니는 먼 곳을 보며 대답했다.
“글쎄.. 난생 처음으로 여행을 간 날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이 장관을 못보고 죽었으면 얼마나 억울했을까. 나는 지금의 두려움보다 나중의 후회가 더 무서워서 여행을 다니는 것 같아.”
할머니는 가장 답답한 건 짧은 영어도, 서툰 인터넷 실력도 아닌 마음처럼 움직여주지도 않는 주제에 자꾸 아프기만 한 허리와 다리라고 했다. 좋은데 다니느라 닳은 관절이라면 억울하지도 않을 텐데 일만 하느라 다 닳아버려 이제 좀 누려보려니 속을 썩인다고, 예순만 되어도 소원이 없겠다며 마른 무릎을 매만졌다.
그는 절대로 사진을 찍는 일이 없었다. 멋진 건축물과 경관과 조형물을 그저 바라만 보았다. 왜 사진으로 남기지 않느냐는 내 질문에 그는 내가 죽으면 불태우느라 애들만 고생 할 텐데 이렇게 바라보고 머릿속에 남기는 게 속 편하다고 대답했다. 그가 풍경들을 머릿속에 새기는 동안 나는 그의 뒷모습을 마음에 새겼다. 꼿꼿하게 등을 펴고 먼 곳을 바라보던 그에게서 두려움이나 망설임 같은 건 느낄 수 없었다. 용기를 사람의 모습으로 치환한다면 지금 이 모습이 아닐까 속으로 생각했다.
용기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그보다 먼저, 무엇이 우리를 도전 앞에서 머뭇거리게 하는 걸까. 너무 늦은 나이일까, 부족한 능력일까, 약한 체력일까. 그런 것들이 과연 핑계가 될 수 있을까. 용기가 필요한 날이면 그를 생각한다. 그의 짧고 꼬불꼬불한 파마머리, 작은 키에 꼿꼿한 등, 몸집보다 더 큰 가방, 주름져 야들야들한 피부를 떠올리면 도전할 수 없는 핑계를 도저히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강이슬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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