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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대하지만 사랑하는’ 그런 가족은 없다

입력
2020.06.18 04:30
27면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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끔찍한 아동학대 사건이 던진 충격으로 떠들썩하더니 벌써 잊혀 가는 분위기다. ‘거짓말을 해서 훈육하느라 그랬다’는 계모는 9세 아이를 작은 가방에 가둬서 숨지게 했다, ‘때렸지만 학대하지 않았고 많이 사랑한다’는 계부는 10세 소녀를 쇠사슬로 묶고, 지지고, 때리고, 굶겼다.

부모에게 학대받는 아이들의 마음 아픈 이야기는 되풀이되었다. 보건복지부 실태조사에 따르면 2014년부터 아동학대 사건은 빠르게 증가해 왔고, 10% 증가율을 보인 2018년만 해도 아동학대가 2만4,603건 발생했고 사망한 아동도 28명이나 된다.

그나마 다행인 건 정부에서 아동학대 방지를 위한 단호한 조치를 취한다는 점이다. 법무부는 1960년에 제정된 민법 915조의 ‘친권자 징계권’을 삭제하겠다고 했고, 경찰에서는 112 아동학대신고 대응 수준을 최우선 긴급출동 단계인 코드1로 격상하고 아동보호전문가 동행과 24시간 대응체계를 갖추겠다고 밝혔다.

친권자 징계권은 체벌을 ‘사랑의 매’로 정당화하고 학대 부모의 양형을 낮추는 핑계로 악용돼 왔다. 2018년 아동학대 사례 2만4,604건 중 9.3%만이 아동학대처벌법으로 조치되었다. 아동학대 사건은 솜방망이 처벌이라는 비판을 받아 왔다. 집행유예 또는 5년 이하의 징역이 대부분이었다.

아동복지법 제4조 소위 ‘원가정 보호 원칙’도 손질되어야 한다. 2018년 아동학대 사건의 82%가 ‘원가정 보호 지속’으로 처리되어 학대가 발생한 그 가정으로 다시 돌려보내졌다. 분리 조치는 13.4%에 불과했다. 천안 소년이나, 창녕 소녀도 학대 조짐이 발견된 초기에 역시 폭력가정으로부터 분리됐다면 이런 비극을 피할 수 있었다. 아동인권을 최우선 가치로 하도록 관련법을 개정해야 한다.

폭언, 감금, 구타, 고문, 협박 등 학대가 있는 가정이라면 아이는 즉각 분리되어 보호될 수 있어야 한다. 학대받은 아동을 신속히 분리조치 하는 데 필요한 인프라가 확보되어야 한다. 2014년부터 2018년 사이에 아동학대 사례는 가파르게 늘어나는 데 비해서 아동보호 전문기관의 증가는 제자리 걸음에 가깝다. 2018년 현재 전국 62개의 아동보호 전문기관이 있다. 아동 쉼터도 턱없이 부족하다. 분리 조치를 내려도 아이들을 보호할 곳이 턱없이 부족한 현실이라고 한다. 이호균 아동인권전문가는 “아동학대를 막기 위해서는 아동보호 전문기관과 쉼터의 확충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돈 벌어오는 가장이, 전업주부인 아내와 의존적인 아이들을 대표하는 자본주의식 ‘가족의 세계’라는 환상도 버려야 한다. 이제 이런 가족은 없다. 남성들이 취직 자체도 힘든 세상이고, 여성들은 이미 직업을 갖고 있으며 아이들도 경제적으로 의존해있지만 미숙하지도 순종적이지도 않다. 아동학대 가해자 중 40대 친부, 30대 친부의 비중이 가장 높은 이유를 가장의 부담감과 연관지어 볼 수도 있겠다. 가부장적 가족에 대한 환상의 끄트머리가 남아 우리 머릿속을 지배한다. “그래도 부모가 아이를 키워야 한다”는 어리석은 처방을 계속 하는 이유다.

법개 정도 중요하지만 고립된 가부장적 가족 모델을 대신할 공동체 육아 모델에 대한 생각을 모아야 할 때다. “한 아이를 기르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아프리카의 속담처럼 사회와 소통하는 가정이 필요한 시기다. 우리 주변에는 훌륭한 이모 삼촌이 되어 줄 동네 이웃들이 많다. 혼자 외롭게 지내는 어른들이 육아의 부담을 조금씩 나눌 수 있으면 ‘82년생 김지영’의 슬픈 독박육아 이야기도 좀 달라질 수 있겠다.

맨발로 탈출한 창녕 소녀를 먹이고 치료하며 보듬어 준 여성 시민, 창문을 열어놓고 허기를 채울 음식의 제공처가 되었던 이웃집, 따뜻한 시선을 가졌던 편의점 주인... 이런 마음들을 모으면 돌봄의 공동체를 만들어 갈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김효선 여성신문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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