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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청산이냐 보존이냐… 제국주의 토론 뜨거운 유럽

입력
2020.06.16 04:30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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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 영국 남서부 브리스틀 시내에서 미국 백인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흑인 조지 플로이드가 사망한 사건에 분노한 시위대가 17세기 노예무역상 에드워드 콜스턴의 동상을 끌어내려 짓밟고 있다. 브리스틀=AP 연합뉴스
7일 영국 남서부 브리스틀 시내에서 미국 백인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흑인 조지 플로이드가 사망한 사건에 분노한 시위대가 17세기 노예무역상 에드워드 콜스턴의 동상을 끌어내려 짓밟고 있다. 브리스틀=AP 연합뉴스

역사에서 지워 마땅한 제국주의 유산인가, 부끄럽지만 기억해야 할 과오인가.

미국에서 시작돼 지구촌으로 번진 인종차별 반대 시위가 유럽에 ‘바람직한 역사 청산 방식은 무엇이느냐’라는 물음을 던지고 있다. 시위대는 차별과 압제의 반(反)인권 역사에 이름을 아로새긴 인물들의 동상을 없애 과거와의 절연을 상징적으로 선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아픈 역사도 역사’라며 동상 보존을 통해 후대가 교훈으로 삼아야 한 반론도 만만찮다.

미 CNN방송은 14일(현지시간) 유럽 곳곳에서 노예제를 옹호하거나 노예 거래에 관여한 인물들의 동상이 철거되고 있다면서 “인종(주의)에 대한 자기반성이 인종적 박해와 편견의 역사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지의 문제로 확대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침략자로서의 부채 의식을 가진 유럽사회가 ‘역사 다시 쓰기’ 작업에 나선 것이다.

벨기에 수도 브뤼셀에 있는 옛 국왕 레오폴드 2세의 동상이 10일 페인트와 낙서로 훼손돼 있다. 인종차별 항의 시위가 유럽 각국으로 확산하면서 최근 벨기에 국내에 있는 레오폴드 2세의 동상이 잇따라 수난을 당하고 있다. 브뤼셀=AP 연합뉴스
벨기에 수도 브뤼셀에 있는 옛 국왕 레오폴드 2세의 동상이 10일 페인트와 낙서로 훼손돼 있다. 인종차별 항의 시위가 유럽 각국으로 확산하면서 최근 벨기에 국내에 있는 레오폴드 2세의 동상이 잇따라 수난을 당하고 있다. 브뤼셀=AP 연합뉴스

7일 성난 시위대에 의해 끌어내려져 강물에 수장된 17세기 영국 노예무역상 에드워드 콜스턴 동상 훼손 사건이 신호탄이었다. 벨기에에서는 잔인한 식민 통치로 ‘콩고의 학살자’라고 불린 레오폴드 2세 국왕 동상이 철거됐고, 네덜란드 서인도회사에서 일하며 식민지 건설에 앞장섰던 해군 장성 피트 헤인의 조각에는 ‘살인자’라는 글씨가 새겨졌다. 제2차 세계대전 승리의 주역인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조차 인도 식민통치 책임과 인종주의 옹호 발언으로 차별 낙인이 찍혀 동상이 훼손될 위기에 놓였다.

역사를 적극적으로 해석하자는 쪽은 문제의 인물 동상을 존치하는 것을 ‘제국주의 미화’와 동격으로 본다. 미 일간 워싱턴포스트 편집인 카렌 아티아는 “동상들은 무지와 책임부인, 인간성 말살과 폭력에 대한 청산 없는 역사를 미화하는 기념물”이라고 매섭게 비판했다. 그는 “대중이 널리 지지하면 동상을 무너뜨리는 일 역시 역사적 행위”라며 구 소련 붕괴 후 레닌과 스탈린 동상이, 이라크전 뒤 사담 후세인 동상이 철거된 사례를 제시했다.

하지만 다른 한 편에선 논쟁적인 인물에 대한 재평가, 특히 제국주의 시대 단죄는 신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영국 일간 파이낸셜타임스의 칼럼니스트 로버트 슈림슬리는 “(미국 건국의 아버지) 토마스 제퍼슨과 조지 워싱턴도 노예를 소유했다. 역사 정화는 어디서 멈춰야 하느냐”라고 반문했다. 예컨대 노예무역상처럼 인권 착취와 말살에 적극 개입한 행위와 당시에는 만연했던 노예제ㆍ식민주의에 대한 무비판적 동조를 지금의 윤리적 잣대를 들이대 동일한 흠결로 치부하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지적이다.

이탈리아 밀라노에 세워져 있는 저명한 언론인이자 역사 저술가인 인드로 몬타넬리의 동상에 13일 인종차별 반대 시위대에 의해 붉은색 페인트가 뿌려져 있다. 기단에는 '인종차별주의자, 강간범'이란 낙서가 돼 있다. 몬타넬리는 파시스트 정권이 일으킨 2차 에티오피아 침공 당시 에리트리아 출신 12세 소녀와 결혼해 성노예로 삼은 인물이다. 밀라노=AP 연합뉴스
이탈리아 밀라노에 세워져 있는 저명한 언론인이자 역사 저술가인 인드로 몬타넬리의 동상에 13일 인종차별 반대 시위대에 의해 붉은색 페인트가 뿌려져 있다. 기단에는 '인종차별주의자, 강간범'이란 낙서가 돼 있다. 몬타넬리는 파시스트 정권이 일으킨 2차 에티오피아 침공 당시 에리트리아 출신 12세 소녀와 결혼해 성노예로 삼은 인물이다. 밀라노=AP 연합뉴스

유럽 주요국 정부는 잘잘못을 떠나 역사적 상징물은 당연히 보존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이날 “역사와 기억을 명확히 살펴보겠지만 어떤 동상도 철거하지 않겠다”고 단언했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 역시 처칠 동상 문제와 관련, “이제 와서 과거를 편집하고 검열할 수는 없다. 다른 역사를 가진 척 할 수 없다”고 말했다. 과오로 얼룩졌더라도 후손들을 위해 역사의 교보재로 남겨두고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는 의미다.

결국 역사의 평가는 민주적 토론을 통한 사회적 합의에 맡겨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유럽의회 정치그룹인 유럽보수개혁(ECR)의 전략가 로버트 타일러는 12일 유럽연합(EU) 전문매체 뉴유럽 기고문에서 “증오의 상징을 없애야 한다는 목소리에 전적으로 공감하지만, 성난 군중이 그것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는 반대한다”면서 “동상 철거 이전에 과거 유산에 대한 논의가 선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나실 기자 verit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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