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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계 단계부터 고문 최적화… 남영동 대공분실은 어떤 곳

입력
2020.06.10 18:00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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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은 고문에 최적화된 공간으로 가득하다. 한 뼘 너비밖에 되지 않는 창은 인권 탄압의 상징이 됐다.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은 고문에 최적화된 공간으로 가득하다. 한 뼘 너비밖에 되지 않는 창은 인권 탄압의 상징이 됐다.
4일 남영동 대공분실 모습.
4일 남영동 대공분실 모습.

10일 6ㆍ10민주항쟁 33주년 기념식이 열린 곳은 서울 용산구 민주인권기념관이다. 민주화운동 당시 ‘남영동 대공분실’로 불리며 온갖 인권탄압이 자행되던 장소이기도 하다. 1987년 1월 고 박종철 열사가 이곳에서 물고문을 당하다 숨졌고, 그의 죽음이 민주항쟁의 신호탄이 되기까지 무수히 많은 ‘박종철들’의 비명이 이 건물에 쌓였다. 박 열사가 죽어간 509호 조사실을, 이날 문재인 대통령이 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방문했다. 남영동 대공분실은 어떤 곳일까.

유신정권 하인 1976년 당대 최고의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남영동 대공분실은 취조와 고문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공간으로 가득하다. 이곳으로 끌려온 이들은 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공권력의 왜곡된 탄압에 압도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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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중한 철문

검은 천에 눈이 가려진 채 끌려온 피해자들은 차에서 내려지자마자 탱크가 밀려오는 듯한 철문 소리에 압도 당했다.

“그 소리를 들으면, 소름이 돋았어요. 눈앞에 껌껌한 채로 엎드려 있는데 차는 멈추고 어디서 탱크 소리가 들린다고 생각해봐요. 극도의 공포감을 느끼는 거지. 혹시 군부대로 끌려온 건 아닐까, 무섭고…” 고문피해자 유동우.

9일 철문 모습.
9일 철문 모습.

◇나선형 계단

피해자들은 건물 뒤편 쪽문을 통해 건물로 들어섰다. 출입문을 통과해 5층 조사실에 이를 때까지 눈은 안대에 가려졌다. 쪽문을 통해 건물로 들어서면 비좁은 호송용 승강기와 몇 층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는 나선형 철제계단이 등장한다. 계단은 그 자체가 심리적 고문 도구였다. 5층 조사실에서 심문을 하다가 원하는 진술이 나오지 않을 때마다 수사관들은 “이 새끼 안되겠다. 지하실로 가자”며 눈을 가리고 팔을 결박한 상태로 계단을 내려가게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거기에 지하실은 없었더라고요. 당시엔 몰랐죠. 밑도 끝도 없이 내려가고 있다는 생각이 드니까, 너무 무서웠고… 어떻게 해서든 상황을 모면해야겠다는 생각에 ‘다 말하겠다’며 올라왔죠.” 고문피해자 황인욱.

이미 긴 시간에 걸쳐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반복해 당해 온 피해자들에겐 더한 고문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를 가상의 지하실이야말로 가장 두려운 대상이었다. 일반적으로 원형계단은 공간적 제약이 있는 경우 설치하지만 이곳에선 심리적 공포를 조성하는데 활용됐다.

나선형 계단의 경사도는 80도에 이른다. 고문피해자 황정옥(56)씨가 뒷문에서 5층 조사실로 바로 통하는 나선형 철제계단을 오르고 있다.
나선형 계단의 경사도는 80도에 이른다. 고문피해자 황정옥(56)씨가 뒷문에서 5층 조사실로 바로 통하는 나선형 철제계단을 오르고 있다.

◇5층 복도

5층에 도착하면 양 옆으로 16개의 조사실이 늘어선 복도가 나타난다. 이곳은 특히, ‘고문과 취조’에 최적화됐다. 피해자들은 마치 이곳이 ‘지하실’ 같았다고 기억한다. 복도 양쪽 끝에 창살로 막힌 작은 창문이 있지만, 빛이 거의 들지 않아 어두컴컴했다. 복도의 천장 등은 대개 꺼져 있었다. 조사실의 문은 서로 엇갈려 배치돼 있다. 마주보고 있는 조사실 문이 동시에 열려도 맞은편에 갇혀 있는 이를 바로 볼 수 없도록 설계한 것이다. 문이 열려도 오로지 벽뿐이니 갇혀 있는 자는 완벽한 고립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문 모양은 하나같이 똑같다. 조사실 문이나 계단, 엘리베이터로 통하는 문 모두 같은 모양이다. 매일 같이 이곳을 드나들었던 수사관들조차 헷갈렸을 정도다. 혹시라도 조사를 받던 피해자가 방을 탈출해도 어떤 문이 출구로 이어지는 문인지 알 수 없도록 만든 것이다.

민주인권기념관으로 변모한 후 시민들에게 공개되는 5층의 모습은 1970~80년대의 원형은 거의 사라진 상태다. 당시의 모습을 유추할 수 있는 흔적 정도만 남아있다.

5층에 들어섰을 때 보이는 모습.
5층에 들어섰을 때 보이는 모습.
5층 평면도.
5층 평면도.

◇509호 박종철 조사실

1987년 1월 고 박종철 열사가 물고문을 당하다 목숨을 잃었던 5층 9호실은 유족들의 뜻에 따라 당시의 욕조와 변기, 침대 및 철제 책상 등의 가구들을 최대한 당시와 같은 원형으로 보존했다.

중앙 세면대 위로 박 열사의 영정 사진이 놓여 있다. 사진 속에서 그는 영원히 스물 한 살이다. 사건 당시 박종철은 서울대 언어학과 재학생이었다. 1987년 1월 13일, 자신의 하숙집에서 불시에 연행됐다. 그는 함께 학생운동에 몸담았던 선배 박종운의 소재를 캐묻는 수사관들의 추궁에도 침묵으로 일관했다. 무차별적인 구타와 폭언, 전기고문, 물고문이 줄줄이 이어졌다. 그는 이 방에 끌려온 지 하루 만에 사망했다.

처음 조사실에 들어선 피해자들은 욕조를 보고 의아해 했다. 1980년대만 하더라도 화장실에 욕조가 갖춰져 있지 않은 가정집이 대다수였다. 구치소나 감옥과 같은 수용시설은 물론이고, 보안사나 안기부와 같은 다른 수사기관에서도 ‘욕조가 있었다’는 전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509호 조사실 모습.
509호 조사실 모습.
문재인 대통령이 10일 오전 서울 용산구 민주인권기념관에서 열린 제33주년 6.10 민주항쟁 기념식을 마친 후 509호 조사실을 둘러보고 있다. 왕태석 선임기자
문재인 대통령이 10일 오전 서울 용산구 민주인권기념관에서 열린 제33주년 6.10 민주항쟁 기념식을 마친 후 509호 조사실을 둘러보고 있다. 왕태석 선임기자

“처음에 욕조를 봤을 땐 ‘저기서 목욕이라도 하라는 건가’ 싶었죠. 고개를 쳐 박히고 나서야 그게 물고문 도구였다는 걸 알았지요.” 고문피해자 최연석.

이곳에서는 욕조에 피해자를 거꾸로 박거나, 수도꼭지를 피해자의 코에 갖다 대고 트는 등의 물고문이 이뤄졌다. 고문기술자로 널리 알려진 이근안 또한 이 욕조가 일상적으로 행해졌던 물고문을 위한 것이었음을 시인했다.

수사관과 피해자들이 마주 앉아 조서와 자술서를 써내려 가던 철제 책상과 의자는 바닥에 고정돼 있다. 행여라도 조사대상자가 가구를 움직여 자해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피해자들은 고문을 당하지 않을 때엔 언제나 이 책상 앞에 앉아야 했는데, 마주 앉은 수사관과의 거리가 워낙 가까웠기 때문에 수시로 구타를 당했다. 수사관은 원하는 진술이 나오지 않을 때마다 손과 발로 가슴과 얼굴을 가격했다.

조사실 내에 있는 침대는 ‘잠을 재우기 위한’ 용도가 전혀 아니었다. 일종의 ‘정신적 고문 장치’였다. 조사실에 한번 들어간 피해자는 단 한숨도 자지 않고 내리 진술서를 써 내야 했다. 2~3일간 잠을 전혀 자지 못한 상태에서 눈 앞에 침대가 보이면 피해자들은 무너져 내렸다.

0 침대에 누울 수 있는 일은 없었다.
0 침대에 누울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고문 피해자 유숙열(67)씨가 비좁은 창문을 들여다 보고 있다.
고문 피해자 유숙열(67)씨가 비좁은 창문을 들여다 보고 있다.

피해자들은 이따금씩 들려오는 기차 소리, 창문 너머로 보이는 시민들의 모습을 보며 안온한 바깥세상의 일상과 철저히 대비되는 자신의 처지에 극심한 좌절감을 느꼈다고 한다. 창문을 통해 바깥을 내다보면, 두꺼운 철문 너머로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대로 보였다. 손에 닿을 듯 가까웠지만, 도저히 잡히지 않을 정도로 멀어져 버린 일상이었다.

창의 너비는 고작 한 뼘, 어린 아이 머리 하나도 빠져나가지 못할 정도로 좁다. 투신 자살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탈출 시도는 꿈도 꿀 수 없었다. 비명조차 새어나가지 못했다. 외부에서도 안을 들여다볼 수 없었다. 맞은 편 회사에 다니는 직원들조차 이 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할 정도였으니.

창문 아래로는 세면대와 변기가 출입문을 향해 배치돼 있다. 교정시설 내 독방 감옥과 비슷한 구조다. 허리보다 낮은 높이의 칸막이가 있지만, 출입문 상단에 위치한 모니터링 카메라를 피할 수는 없다. 용변을 볼 때나, 몸을 씻을 때나 끊임없이 감시 당한다. 기본적인 존엄성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구조다.

◇다른 조사실 내부

현재 조사실 내부의 벽면과 천정은 밝은 초록색이지만, 피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조사실마다 벽면과 타일의 색이 달랐다고 한다.

특히 일부 조사실은 짙은 붉은 색을 띄었는데, 누란 빛깔의 백열등 불빛을 받아 천지사방이 ‘핏빛’으로 보였다고도 전해진다. 이 붉은 방에 갇혔던 피해자들은 특히 더 극심한 불안과 공포를 느꼈다.

다른 조사실 모습.
다른 조사실 모습.

◇남영동 대공분실이 바로 앞에 보이는 테라스

고문 수사관들이 식사를 하던 식당 별관은 남영동 대공분실 본관이 정면으로 보이는 위치에 자리하고 있었다. 폭이 좁고 긴 5층 조사실의 창문들이 훤히 보이는 이 테라스에 앉아, 그들은 여유롭게 후식 커피를 마셨다.

죄 없는 사람들이 짐승처럼 다뤄지는 풍경 앞에서 이들은 저녁 메뉴를 고민했다. 부인에게 전화를 걸어 아이의 안부를 물었으며 동료들과 담뱃불을 나눠 붙였다. “더 효과적으로 패려면, 보약이라도 지어 먹어야 해”라며 우스갯소리를 주고 받았다.

피해자들은 그들을 ‘악마’로 기억하지 않았다. 그들의 행한 악은 ‘국가주의’라는 신념 아래 지극히 평범한 것이었다.

건물 건너편 테라스 모습.
건물 건너편 테라스 모습.

남영동 대공분실은 1990년대 이후 경찰청이 관리했다. 2018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로 이관돼 대중에 공개되기 전까지 약 20여 년간 경찰들의 체력단련 시설로 쓰였다. 현재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수도권 공공시설 운영 중지’에 따라 14일까지 임시 휴관 중이다. 2022년 ‘민주인권기념관’으로 정식 개관할 예정이다.

박지윤 기자 luce_jyun@hankookilbo.com

김주영기자 will@hankookilbo.com

문소연 이동진 인턴기자

10일 509호 자리에 꽃이 달려 있다. 왕태석 선임기자
10일 509호 자리에 꽃이 달려 있다. 왕태석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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