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의 트루스오디세이] ‘죽고 살기 식’ 게임이 되는 순간, 정치는 사라진다

입력
2020.06.11 04:30

 <22>게임이 된 정치 

 

 ※시대의 독설가, 피아 구분 없는 저격수를 자처하는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가 ‘포스트 트루스’ 시대의 여러 현상들을 미디어 이론을 통해 조명해보는 글을 씁니다. 매주 목요일 ‘한국일보’에 연재합니다. 

20대 국회에도 여야의 극한 대립은 그치지 않았다. 정치를 사생결단의 전투로만 여겨서다. 지난해 12월 27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선거법 개정안이 통과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아티스 왕의 치세에 리디아 전역에 기근이 들었다. 리디아인들은 한동안 이 고통을 이겨내려 했지만 여의치 않음을 깨닫고, 이 악의 치유책을 찾기 시작한다. 주사위, 허클본, 공놀이 등 여러 사람이 여러 방편을 고안해냈다. 기근에 대항해 그들이 취한 계획은 하루는 완전히 게임에 몰두해 식욕을 잊어버리고, 이튿날은 식사는 하되 게임은 삼가는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18년을 버텼다.”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나오는 얘기다.

 

 ◇놀이하는 인간 

“우리의 문명은 놀이 속에서 탄생하여, 놀이로서 전개됐다.” 요한 하위징아의 말이다. 그에 의하면 철학은 원래 지혜를 겨루는 현자들의 수수께끼 놀이에서 탄생했다고 한다. 전쟁도 과거에는 스포츠와 비슷해서 신사적인 규칙에 따라 수행됐다. 사법이나 정치에는 편을 갈라 겨루는 놀이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다. 멀지 않은 과거만 해도 노동에는 춤과 노래가 따랐고, 공동체의 삶에는 축제와 놀이가 동반됐다.

하지만 놀이하던 인간들이 언제부터인가 놀 줄을 모르게 됐다. 오늘날 공장에는 노동요가 들리지 않는다. 스포츠마저 요즘은 진지한 비즈니스가 되어버렸다. 전쟁에 마지막으로 남은 스포츠적 요소가 ‘선전포고’인데, 한국전쟁이나 태평양전쟁은 그마저도 생략해 버렸다. 근대 이후에 삶은 과도하게 진지해졌다. 놀이는 삶의 주변으로 밀려나 아이들의 것이 되었다. 그나마 한국에서는 아이들도 놀지 못한다.

그렇게 사라졌던 놀이가 최근 다시 삶으로 복귀하는 모양이다. 그 징후 중의 하나가 바로 ‘게이미피케이션’(gamification)이다. 게이미피케이션은 놀이의 특징인 ‘재미’를 게임이 아닌 영역에 적용해 문제를 해결하는 기술로 오늘날 교육, 연구, 훈련, 비즈니스 등 다양한 영역에 활용되고 있다.

로베르토 베니니 감독의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에는 이렇게 현실을 게임으로 바꿔놓음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는 기발한 예가 등장한다. 아들과 함께 유태인 수용소로 끌려간 귀도. 그는 5살 먹은 아들에게 그 혹독한 현실을 게임이라 속인다. “저 독일군들에게 이기면 상으로 탱크를 받는 거야.” 오랜 수용소 생활에 지친 아이가 ‘게임 그만하고 집에 가자’고 조르자, 귀도는 주섬주섬 짐을 싸는 척하며 이렇게 말한다. “아깝다. 거의 다 이겼는데.” 이 말에 아이는 게임을 계속하기로 하고, 결국 수용소로 진주한 미군의 탱크에 올라타게 된다.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의 한 장면. 유태인 수용소로 끌려간 귀도는 아들 조슈아에게 끔찍한 현실을 들키지 않으려 캠프에서 살아남는 게임이라 속이며 안심시킨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거대한 매직 서클 

‘매직 서클’이라는 개념이 있다. 매직 서클은 마법이나 놀이의 공간으로, 그 안에서는 일상의 것과는 특수한 법칙이나 규칙이 적용된다. 예를 들어 ‘오징어’ 놀이가 벌어지는 공간에서 아이들은 깨금발로 다녀야 한다.

게이미피케이션은 현실 위로 거대한 매직 서클을 드리운다. 언젠가 속초라는 도시 위로 포케몽의 세계가 내려앉은 것처럼 말이다. 디지털시대에는 현실 자체가 거대한 VR과 AR 게임으로 바뀌어 간다.

정치도 거기서 예외는 아니다. 하워드 딘이 2004년 대선후보 경선에 게이미피케이션을 처음 도입한 후, 오바마와 클린턴 등 민주당의 대선캠프에서 이 기술을 유세에 적극 활용해 왔다. 원리는 다른 게임과 다르지 않다. 지지자들에게 캠프의 콘텐츠를 퍼나르는 등 유세에 도움이 되는 다양한 ‘임무’(mission)를 부여하고, 그 ‘보상’(reward)으로 참여자에게 배지를 부여하거나, 리더보드에 그들의 이름을 올려주는 것이다.

한국의 게이미피케이션은 차원이 달랐다. 여기서는 정치가 게임을 도입하는 수준을 넘어 정치가 아예 거대한 컴퓨터 게임으로 변했다.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는 그 자체가 거대한 MMORPG(대규모 다중 사용자 온라인 롤 플레잉 게임ㆍMassive Multiplayer Online Role Playing Game)였다. 그 현장을 인터넷으로 생중계했던 나는 시청자들의 지시를 받아 움직이는 게임의 캐릭터가 되었다. 영화와 달리 게임은 스토리의 전개를 플레이어들에게 맡긴다. 그때 대중은 집단으로 시위의 스토리를 직접 창작해 나갔다.

정치 게임화는 민주주의를 더 생동적으로 만들어준다. 그것은 수동적 투표자로 머물렀던 유권자를 능동적 플레이어로 바꾸어 놓는다. 오늘날 대중은 정치의 서사를 스스로 쓰고 싶어 한다. 그들을 포섭하려면 정당은 그들에게 ‘미션’을 부여하여 그들을 플레이어로 만들어야 한다. 별도의 ‘보상’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그들에게는 선거의 승리를 자신이 직접 만들어냈다는 자부심. 그것이 최고의 보상이다.

버락 오바마 미국 전 대통령의 대선캠페인 사이트 ‘버락오바마닷컴 (Barack Obama.com)’. 지지자들을 결집시키고, 자발적으로 기부금 모금 및 선거운동을 진행하는 선거 플랫폼 역할을 수행하며 대선 승리를 이끌었다. 홈페이지 캡처

 

 ◇착란으로서 정치게임 

물론 거기에는 심각한 부작용도 따른다. 성격이 다른 정치와 게임을 같은 것으로 혼동할 때, 대중은 착란에 빠지게 된다. 가장 큰 문제는 그 착란이 사회를 두 개의 적대적 진영으로 찢어놓는다는 데에 있다. 정치에는 중도층이 존재한다. 하지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토트넘이 대결하는 경기장에 어느 편도 아닌 이를 위한 좌석은 없다. 정치에는 스윙보터가 존재한다. 하지만 경기 도중 응원하는 팀을 바꾸는 팬은 존재하지 않는다.

정치의 게임화는 진영논리를 강화한다. 골대 앞에서 우리 편이 넘어지면 무조건 ‘페널티 킥’이고, 상대편이 넘어지면 무조건 ‘할리우드 액션’이다. 상대편에게 휘슬을 불면 ‘공정한 심판’이고, 우리 편에게 휘슬을 불면 ‘매수된 심판’이다. 이 운동장 마인드로 무장한 이들은 정치에서도 ‘팀플레이’를 강조한다. 거기서 아군을 비판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이른바 ‘팀 킬’을 하면 우리 편에게 보복 당하고, 상대편에게는 조롱 당한다.

합리적 판단이 무용한 곳에서 사람들은 이성의 스위치를 내려놓고 무공을 세우는 데에 몰두하게 된다. 그 결과 인성에도 변화가 생긴다. 이성은 격정으로 대체되고, 개인은 집단에 흡수된다. 논쟁이 전쟁으로 바뀌면 논리보다 무력이 중요해진다. 논리로 견해를 반박하는 것은 귀찮은 일이다. 팀플레이로 그 견해의 주체를 ‘킬’하면 그만이다. 정치의 게임화는 현대인을 문명화의 성과를 거슬러 중세의 호전적 전사들로 되돌린다.

과연 21대 총선도 ‘한일전’이라는 이름의 증강현실 게임으로 치러졌다. 최근 그 후속편이 나온 모양이다. 게임의 이름은 ‘해방전후사’. 간첩 잡는 ‘친일파’와 왜구 잡는 빨갱이들이 붙었다. 양측의 플레이어들은 게임에 과몰입한 나머지 그 허구가 현실이라는 착란에 빠졌다. 친일파와 빨갱이가 서로 죽일 듯 싸우다가 갑자기 한 목소리로 외친다. ‘이용수는 가짜 위안부다.’ 허구가 현실이 되면, 이렇게 현실은 허구가 된다.

21대 국회가 개원한 5일 본회의장에서 미래통합당 주호영 원내대표가 의사 진행 발언을 마친 후 통합당 의원들이 의장선출을 보이콧하며 동시에 퇴장하고 있다. 오대근기자

 

 ◇닝겐쇼기 

게임과 놀이는 성격이 서로 다르다. 게임은 놀이지만, 정치는 일이다. 게임에서는 승리 자체가 목적이나, 정치에서 승리는 그저 수단일 뿐이다. 정치의 목적은 그 승리로 얻은 권력으로 공동체의 과제를 해결하는 데에 있다. 하지만 정치가 게임이 되면 이 본연의 목적은 뒷전으로 밀린다. 정치인과 유권자 모두 또 다른 승리를 위해 바로 다음 게임에 돌입한다. 그러니 국회나 정부가 매번 ‘역대 최악’의 기록을 경신할 수 밖에.

게임은 원래 ‘재미’로 하는 것이다. 정치-게임의 플레이어들 역시 거기서 ‘재미’ 외에 다른 보상을 기대하지 않는다. 반면, 정치는 물질적 이해의 문제. 정치인들은 거기서 다른 의미의 ‘재미’를 본다. 정치를 게임으로 소비하는 이들은 일본에서 행해지는 ‘닝겐쇼기’(人間將棋ㆍ인간이 장기말 모양의 의상을 입고 펼치는 게임)의 말들을 닮았다. 언뜻 보면 말들이 스스로 행마를 하는 듯하나, 사실 그들은 장기판 밖의 기사(棋士)의 지시에 따라 움직일 따름이다.

제 이해와 별 관계가 없고, 남들의 배나 불려주는 게임에 왜들 그렇게 광적으로 몰입하는 걸까. 맨 정신으로는 현실이 견디기 힘들어서 그러는지도 모른다. 경제는 어려워지고, 사회는 위험해지고, 개인의 삶은 날로 불안해지고 있다. 하지만 놀이에 몰입한 동안에는 그 구질구질한 현실을 잊을 수 있다. 더구나 다른 놀이와 달리 정치는 저 모든 문제를 일거에 쓸어버릴 절대 반지를 따는 게임이 아닌가.

게임으로 변한 정치에 과몰입한 이들을 보면, 18년 동안 놀이로 기근의 고통을 잊었던 리디아의 백성들이 떠오른다. 그들은 어떻게 됐을까.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전략은 실패로 끝났다. 아티스 왕은 결국 나라를 둘로 갈라, 절반의 인구를 나라 밖으로 내보낸다. 좌우 애국자들이 벌이는 게임도 이 나라를 구하지는 못할 것이다. 다소 시끄럽지만, 저게 다 애들이 크는 소리다. 애들은 저러면서 큰다.

 진중권 미학자, 전 동양대 교수 

진중권의 트루스 오디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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