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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모멸과 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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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5일 미국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 대로변에서 백인 경찰 데릭 쇼빈은 비무장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의 목을 무릎으로 짓눌러 사망케 했다. “숨을 쉴 수 없다”는 호소에도 득의양양 고개를 쳐들고 누르기를 멈추지 않았다. 동영상에 노출된 그 섬뜩한 표정에 진저리가 쳐졌다.
9년 전 일이다. 해외연수 프로그램으로 미국 뉴저지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다. 아이와 마트를 다녀오는 중, 낯선 주택가를 지나는데 경찰차가 경광등을 밝히며 뒤따라왔다. 순간 미국 경찰에게 잘못 대응했다간 큰일 난다는 경고가 머리를 스쳤다.
느릿느릿 다가온 경찰은 길모퉁이에서 일단 정지해야 하는 ‘스톱 사인’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며 면허증을 달라고 했다. 분명 멈추고 속으로 하나, 둘, 셋을 셌는데 억울했다. 아직 현지 면허가 나오기 전이라 한국에서 발급한 국제운전면허증을 내밀었다. 경찰은 한참을 들여다보더니 여권도 달라 했다. 깜박 잊었다고 하자 표정이 바뀌었다. 여권 없는 국제면허증은 효력이 없으니 무면허 운전 상황이라고 몰아붙였다. 어이가 없어 무슨 소리냐며 항변했지만 들으려 하지 않았다. 잔뜩 인상을 쓰기 시작한 경찰은 총이 있는 허리춤을 만지작거리며 다짜고짜 차에서 내리란다. 더 이상 운전해선 안 된다는 것. 그리곤 곧장 견인차를 불렀다.
비 내리는 저녁 낯선 길에서 그렇게 차에서 쫓겨났다. 경찰이 떠나기 직전 지었던 음흉한 표정은 지금도 생생하다. 애먼 벌레를 짓이겨놓고 묘한 쾌감을 느끼는 듯한, 플로이드의 목에 올라탄 경찰 얼굴에서도 순간 스쳤던 그 표정이다. 그날 한참을 모멸의 비를 맞고 걸으며 ‘위대한 아메리카’를 곱씹었다.
이후 하소연을 들어준 주변의 지인들은 초반에 된통 걸렸다는 위로와 함께 자신들의 억울한 경험들을 하나씩 꺼내놓았다. 피부색이 달라서라는 자조와 함께.
2009년 흑인 청년 오스카 그랜트가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사망한 사건을 모티브로 하는 앤지 토머스의 소설 ‘당신이 남긴 증오’에서 흑인 소녀 스타는 친구 칼릴의 차를 함께 타고 가다 경찰 검문을 받는다. 긴장한 스타는 어릴 적부터 누누이 들었던 경찰과 맞닥뜨릴 때 대처요령을 떠올린다. ‘무조건 시키는 대로 해, 대들지 말고, 두 손은 보이는 곳에 두고, 경찰이 등을 보일 때 움직이는 것은 건 어리석은 짓이야.’ 하지만 칼릴은 몸수색을 당한 뒤 경찰이 잠깐 등을 보일 때 차 안의 스타가 걱정스러워 안부를 묻다 그만 총격을 받았다.
하지만 이후 사건은 이상하게 흘러간다. 총을 쏜 경찰은 기소되지 않았고, 칼릴이 예전 마약을 팔았던 사실만 부각됐다. 스타는 항변한다. “죽은 사람이 살해당한 죄로 기소될 수 있는 건가. 흑인이고 빈민가에 산다고 나쁜 사람이라 생각한 것 아닌가. 그런 선입견이 칼릴을 죽였고 나도 죽일 수 있었다.” 피부색이란 이유만으로 짓눌려온 또 다른 플로이드는 그 동안 얼마나 많았겠는가.
인종차별이 남의 나라만의 일은 아니다. 콩고 출신 난민인 욤비 토나는 책 ‘내 이름은 욤비’에서 한국에서의 지독한 차별을 고발한다. 공장에서 일할 때 직원들은 무턱대고 그를 미워하고 욕을 했다. 도무지 이유를 몰랐던 그는 나중에 나이지리아 친구로부터 답을 듣는다. “한국 공장에서 한국 사람은 무조건 왕이야. 그 다음이 조선족이고, 그 다음이 필리핀이나 베트남에서 온 사람들이지. 아프리카? 아프리카 사람들은 사람도 아니야.”
코로나19는 미국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혐오와 차별의 민낯을 드러냈다. 외국인과 성소수자에 대한 분별없는 낙인과 혐오는 모질었다. 모른 척, 아닌 척 했던 우리 사회의 야만성이 적나라하게 들통났다. 하지만 아직도 개신교계 보수 세력의 반대로 변변한 ‘차별금지법’ 하나 만들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우린 또 얼마나 많은 모멸과 분노를 방치하려는 건가.
이성원 스포츠부장 sungw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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