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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어느 ‘실패한’ 혁명가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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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서촌을 유유자적하게 걷다가 한 찻집 앞을 지나게 됐다. 찻집 앞 소담한 화단에 발길이 멈추었다. 장미, 쥐똥나무, 고광나무, 수사해당화, 낮달맞이꽃, 붓꽃이 그려낸 한 폭의 수채화. 6월의 따가운 햇살 아래 한낮의 서촌 골목은 눈이 부셨다.
그런데 꽃 이야기가 아니다. 이곳에서 나는 오랫동안 망각한 한 이름을 만난 것이다. 그 사람의 사진전이 갤러리를 겸한 이 카페 2층에서 열리고 있었던 것이다.
내 연배쯤 되면 그 이름 석 자를 모르는 이 없겠지만, 세월이 준 망각은 누구의 과오도 아닐 게다. 한때 어둡고 핍진한 시대의 아이콘, 신화 같기도 했던 얼굴 없는 수배자, 사형을 구형받은 사회주의 혁명가, 야간 상고가 학력의 전부인 섬유·금속·정비 노동자, 첫 시집이 금서임에도 100만부가 팔렸다는 시인. 그러나 그는 어느 날 홀연히 우리 관심과 시야에서 사라졌다.
1984년 스물일곱 먹은 공장 노동자가 쓴 시집 ‘노동의 새벽’은 세상을 뒤흔들었다.
“전쟁 같은 밤일을 마치고 난/새벽 쓰린 가슴 위로/차거운 소주를 붓는다”(‘노동의 새벽’)
“미싱을 타고 미싱을 타고/갈라진 세상 모오든 것들을/하나로 연결하고 싶은/시다의 꿈으로”(‘시다의 꿈’)
시는 적나라했고 투박했고 통쾌했다. 문단은 경악했다. 대학생들은 그의 시를 읽고 공장으로 뛰쳐나갔다. 시집 속 20편이 민주화 시위의 노래로 바쳐졌다. 독재정권은 재빠르게 금서 딱지를 붙이고 그를 수배했다.
1989년 이 수배자는 사회주의를 공개적으로 천명한 ‘남한사회주의 노동자동맹(사노맹)’을 결성한다. 7년을 숨어 지낸 그는 1991년 체포돼 사형이 구형되고 무기징역에 처해졌다. 수감 7년 만인 1998년 광복절, 김대중 대통령은 그를 특별사면했다.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복권되었지만 그는 국가보상금을 거부했다.
그는 0.75평 독방에서 ‘변절’했다. 긴 수감 생활 내내 삭발, 묵언 수행, 매일 20㎞ 달리기, 12시간 독서에 매달렸다. 옥중에서 두 번째 시집 ‘참된 시작’을 냈다, 시어는 변했다. 절규, 저항, 눈물, 증오, 절망, 죽음의 그림자는 사라졌다. 그 자리에 들어온 것은 생명, 생태, 영혼, 평화, 나눔, 희망이었다.
시인은 2010년 12년 만의 시집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를 내면서 이렇게 말했다. “시인이자 노동자이자 혁명가로 온몸을 던져 살았지만 슬프게도 길을 잃어버렸다. 실패한 혁명가로서 책임을 져야 했다. 유명해진 이름마저 잊히기를 바라면서 긴 침묵의 시간을 가졌다.”
그는 출옥 2년 후 ‘생명, 평화, 나눔’을 기치로 한 비영리단체 ‘나눔문화’를 만들었다. 그리고 낡은 필름 카메라를 들고 세상을 떠돌았다. 중동, 아프리카, 아시아, 중남미 등 전쟁과 분쟁과 가난이 있는 지역을 유랑하며 사진을 찍고 시를 썼다.
카페 2층의 아담한 전시장에 올라갔다. 전시 제목은 ‘단순하게 단단하게 단아하게’. 수단의 어느 시골 길가에 빨래가 펄럭인다. 그는 이렇게 사진 설명을 붙였다. “어디서나 소리 없이 나부끼는 빨래는 어떤 국기보다 빛나는 평화의 깃발이다. 정직한 노동의 땀방울을 씻어내고, 사나운 폭격의 핏방울을 씻어내고, 고단한 마음의 얼룩까지 씻어낸.”
‘불순한’ 노동자요, ‘불온한’ 시인이요, ‘위험한’ 혁명가였던 사람. 이제는 혁명의 깃발보다 아프리카 가난한 농부의 빨래 깃발이 지상에서 가장 위대하다는 ‘변절자’.
이름이 오늘도 신문 지상에 오르내리는 그의 혁명 동지들은 지금 현실 정치에 있다. 그는 “과거를 팔아 오늘을 살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63세가 됐다. 나는 그가 이제 필명 ‘박노해(박해받는 노동자들의 해방)’마저 놓아주고 본명 ‘박기평’으로 살았으면 한다. 그가 실패한 혁명가여서 좋다.
한기봉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윤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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