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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C] 소녀상 중심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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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예술가가 먹고 살기 힘든 세상이다. 실험하는 전위한테 시장은 자리를 주지 않는다. 많이 팔려면 과녁이 크고 확실해야 한다. 도리가 없다. 예술가는 살뜰할 필요가 있다. 창작물 소유권 챙기기는 당연하다. 대인배처럼 굴다 굶어 죽기 십상이다.
‘평화의 소녀상’이라고 저작권이 없을 리 없다. 한복을 입고 맨발 뒤꿈치를 든 채 의자에 앉아 있는 단발머리 소녀. 어깨에는 새, 옆 자리에는 빈 의자다. 한국저작권위원회 저작물 정보에 조각가 부부가 세세하게 등록해 둔 소녀상의 디자인이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 하나 둘, 예외가 쌓이다 보면 결국 원칙이 무너지게 마련이다. 줄곧 자비는 없었다.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 제1호 소녀상이 세워진 지 근 2년 만인 2013년 여름, 교육용이니 괜찮을 줄 알고 서울 서초고가 허락 없이 원조를 베끼려다 작가의 경고에 포기한 뒤 광주와 전남 나주시 등의 소녀상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고 한다. ‘윤미향 블랙홀’ 탓이어도 별로 새삼스럽지 않은 최근 강원 태백시와의 시비에 새삼 야박하다 힐난하는 사람들이 작가는 오히려 야박할지 모르겠다.
조각은 힘이 셌다. 미학적 평가는 기자에게 주제 넘는 짓이다. 하지만 큰 부분 소녀상의 인기가 반일 민족주의 덕분일 거라는, 편승의 결과인 듯하다는 짐작은 아무래도 사실 같다. 우리 민족은 제국주의 일본에게 농락 당한 피해자이고, 수난사의 증인이 바로 일본군 위안부라는 게 종교적 신앙에 가까운 한국인 일반의 신념이다. 고통의 집단 파토스(정서)에 업혀 물신화한 소녀상은 전국으로 팔려 나갔다.
우리에게는 소녀상밖에 안 보인다. 3년마다 열리는 일본의 대표적 국제 미술제 아이치 트리엔날레가 지난해 파행한 건 ‘일본 국민의 마음을 짓밟는’ 소녀상이 출품됐기 때문만은 아니다. 문제가 된 기획전 ‘표현의 부자유전(不自由展)’에는 소녀상과 함께 히로히토 전 일왕의 사진을 태우는 영상 전시물도 포함됐고 일본 우익은 그 불온에 더 격앙했다. 유명세 피해자연(然)으로 조각가의 지명도는 더 높아졌고 조각과 민족 간 결속도 단단해졌다. 하지만, 표현의 자유 침해로 꾸짖을 일이었다.
‘우리라서 옳다’는 게 진영 논리다. 진실ㆍ정의의 기준이 한갓 편협한 이해관계라니. 국민을 ‘정치 종교’에 빠뜨리기 위해 국가가 동원하는 대표적인 숭배 대상 중 하나가 민족이라는 게 역사학자 임지현의 주장이다. 논객 진중권은 최근 “‘국가주의 남성 권력으로부터 여성과 개인을 보호한다’는 인류 보편 가치를 추구하는 만큼 위안부 운동은 일본인마저 우리 편이 될 때 비로소 완성된다”며 “일본 증오를 부추기는 민족주의 선동은 퇴행”이라 일갈했다. 한일전(戰) 프레임을 벗어야 한다.
추상은 실존을, 전체는 개인을 소외시키는 법이다. 소녀상이 기억의 수단인 건 분명하다. 하지만 청동상에 목도리를 둘러주는 연민이 할머니를 따뜻하게 해주지는 못한다. 외려 망각에 필요한 알리바이를 제공할 따름이다. 현실에서는 구체적ㆍ입체적인 위안부 피해자 개인의 삶과 사정이 정형화한 민족 국가 서사로 환원될 수는 없다. 주객전도가 일어난다. 가상 위안부의 상(像)이나 민족의 이익과 운동 명분에 맞지 않으면 실재 당사자가 잘려 나갔다. 배봉기가 그랬고, 심미자가 그랬다.
그리고, 이용수가 그럴 위기다.
전형화만 문제가 아니다. 스테레오타입 자체도 문제다. 왜 하필 소녀였나. 클리셰였다면 일단 반(反)예술이다. 무의식적이거나 안이한 가부장제 순결 이데올로기의 구현이라면 반(反)페미니즘이다. 끌려가지 않았다면, ‘자발적 매춘부’였다면 피해자가 아닌가. 소녀상 틀에 맞춰 다양한 피해자 목소리를 재단하고 그들을 대상화한다면, 피해자를 주체화하는 피해자 중심주의도 아니다. 소녀상 중심주의일 뿐이다.
권경성 문화부 기자 ficcione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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