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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보수적이라 급진적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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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의 본산이라는 영국에서 역대 가장 존경 받는 정치인은 누구일까. 조사결과마다 다르지만 대체로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 윈스턴 처칠 총리를 꼽는다. 몇몇 조사에서는 윌리엄 셰익스피어를 제치고 영국 역사를 통틀어 가장 존경 받는 인물로 뽑힌 적도 있다. 처칠은 인류 최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정당을 초월해 국가적 인물이라는 최고의 찬사를 받았다. 정치인이 조롱의 대상이 돼온 한국 사회의 풍토에 비취 보면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위대한 정치인도 2020년 기준으로 보자면 ‘악플’이 따라 붙을 수밖에 없는 문제적 인물로 비난 받곤 한다. 그는 영연방 중심의 철저한 제국주의자이면서 인종차별주의자였고, 전쟁광이자 귀족 출신의 계급주의자였다. 게다가 탈당 이력이 있고 동료 의원들을 자주 공격해 보수당 내에서도 인기가 없었다. 1900년 보수당 하원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한 그는 1904년 자유당으로 말을 갈아탔다. 1924년 보수당으로 돌아온 그에게 동료들이 냉랭했던 것은 당연했다. 역사상 손꼽히는 전쟁 지도자였지만 ‘처칠에게 환호하고 노동당에게 투표하라’는 구호가 먹힐 정도로 그는 선거에서는 패배의 쓴잔을 맛보기도 했다.
결점투성이인 그가 그럼에도 최고의 찬사를 받는 이유는 뭘까.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자신이 집필한 ‘처칠 팩터’를 통해 처칠이 보수를 넘어 영국 정치의 상징으로 자리잡은 이유를 분석했다.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사건의 흐름을 지켜보면서 자신의 입장을 적당히 상황에 맞춘 뒤, 해결방안을 잘 포장해서 공적을 인정받으려고 하지만, 처칠은 자신만의 통찰과 의지로 사건을 꿰뚫어보고 바꾸려고 했다. 자신이라면 하지 않았을 일은 결코 남에게 지시하지 않은 언행일치의 표본이었다. 내로남불이 일상화된 한국 정치권에선 보기 드문 인물이다.
그러나 처칠이 진정한 보수주의자로 인정 받는 이유는 따로 있다. 그는 보수를 현재 상황을 지키는 것으로 정의하지 않았다. 처칠은 보수적이기 때문에 급진적이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상황을 똑같이 유지하는 방법은 상황을 바꾸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변화수단이 없다는 것은 보존수단이 없다는 것을 의미했기에, 처칠은 성공적인 보수주의자로 기억되기 위해 종종 피할 수 없는 변화를 선도했다. 연금수령 연령을 낮추고 직업소개소를 세우는가 하면, 노동자에게 휴식시간을 제공하는 등 당시로선 파격적인 사회 개혁안을 입안했다. 그가 ‘좌경적 보수주의자’란 영광스런 호칭을 얻은 이유도 복지국가의 토대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이런 기준으로 따지면 한국 정치사에서 진정한 보수정당은 찾아보기 어렵다. 현재 제1야당인 미래통합당도 ‘기득권 정당’ ‘부자 정당’ ‘이익집단’ 이미지도 모자라 ‘극우적 퇴행 정당’이란 평가까지 받고 있다. 총선 참패로 정당 자체가 소멸할 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도는데도 집안싸움에 여념이 없었다.
그런 보수야당이 최근 변화의 몸부림을 치고 있다. 김종인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이 진보를 능가하는 쇄신 의지를 다지면서 진취와 변화를 모토로 내세웠다. ‘약자와의 동행’이란 슬로건에 맞춰 ‘변화 그 이상의 변화’를 꿈꾼다는 비전을 제시했다. 반대를 위한 반대가 아니라 정책에서도 선도적 역할을 하겠다는 포부도 밝혔다. 말잔치에 그칠지 실질적 변화로 이어질지는 지켜봐야겠지만, 그 동안 너무 변한 것이 없어서 변화시킬 게 무궁무진하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너무 관심 분야가 적었기 때문에 관심 둘 분야가 무궁무진하다는 점도 분명해 보인다.
윤미향 의원을 감싸고 금태섭 전 의원을 징계하는 거대여당의 행태를 보면, 앞으로 여당에게 의미 있는 변화를 기대하긴 힘들어 보인다. 이제 ‘변화’는 여당보다는 야당에게 어울리는 단어가 될 것 같다. 보수적이라 급진적이었던 처칠의 망령이 한국 보수정당에서 되살아나기를 바란다.
강철원 기획취재부장 stro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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