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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 칼럼] 적당량의 여론이 되고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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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말, 한국은 미국과 2020년 주한미군 주둔비 협상에 나서면서 미국의 일방적인 증액에 대응하기 위해 세 가지 카드를 준비했다. 첫 번째는 되돌려 받게 될 주한미군 기지 4곳의 오염 정화 비용 1,100억 원을 한국이 부담한다는 것(추가로 반환될 기지 22곳에도 똑같은 양보가 적용된다면 한국의 부담액은 그보다 더 늘어난다), 두 번째는 미국산 무기의 대량 구매, 세 번째는 미국이 지난해 7월부터 호르무즈해협에 한국 군함을 파견해 달라는 요청에 응한다는 것이었다.
제5차 회담이자 지난해 마지막 회담이 열렸던 12월 17일, 미국과 이란 사이의 무력 충돌 위기는 아직 생겨나지 않았다. 올해 1월 5일, 미군이 가셈 솔레이마니 이슬람혁명수비대 특수부대사령관을 드론 공격으로 살해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미국은 아덴만에서 작전 중인 한국 청해부대(왕건함)의 작전 범위를 호르무즈해협까지 확대해 주기를 다시 요청했고, 국방부는 1월 21일 호르무즈해협보다 더 깊은 페르시아만(아라비아만)까지 작전 범위를 확대한다고 발표했다. 현재 소강상태인 미국과 이란의 갈등이 이대로 아물면 다행이지만 더 나쁘게 상황이 전개되면, 청해부대의 안전은 물론이고 미국 편이 된 한국은 아랍권의 적성국으로 분류될 수 있다.
주한미군 주둔비 협상에서 미국은 한국이 내놓은 카드에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럴 때는 테이블 밑에 있는 상대방의 정강이를 걷어차야 한다. 군대에 갔다온 한국 남자들이 보통 ‘촛때비’라고 부르는 이 부위는 아랫다리 앞뼈를 가리키는데, 회담장에서 미국 대표의 정강이를 진짜로 까라는 건 아니다. 그냥 ‘우리도 핵개발을 하겠어!’라는 신호를 주는 것이다. 인도에 이어 파키스탄이 핵 개발을 선언하자 신무기를 주겠다면서 미국이 파키스탄을 달랬던 사례가 실제로 있다. 이창위의 ‘북핵 앞에 선 우리의 선택’(궁리, 2019) 112쪽에 “한국 정부가 결심만 한다면 1년 6개월 내에 완성된 핵무기를 실전 배치할 수 있다”라는 전문가의 호언장담도 있느니만큼, 미국이 못들은 체하기 힘들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9월 14일, 청와대에서 CNN과 인터뷰를 했다. 이때 CNN 서울 특파원이 “미국의 핵우산을 믿기보다 스스로 핵무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을 했다. 문 대통령의 대답은 공립학교 교장 선생님의 그것과 같았다. “한국의 국방력을 높여 나가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생각을 같이한다. 그러나 북한의 핵에 대응해서 우리가 핵 개발을 해야 한다거나, 전술핵을 다시 반입해야 한다는 생각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북한의 핵에 우리도 핵으로 맞서겠다는 자세로 대응한다면 남북 간에 평화가 유지되기 어려울 것이고, 또한 그것은 동북아 전체의 핵 경쟁을 촉발시켜서 동북아 전체의 평화와 안정을 저해할 것이라고 판단한다.”
앞서 말한 신호가 트럼프에게 효과 이상의 파괴력을 가지려면, 먼저 국내에서 적당량의 핵무장론이 여론으로 존재해야 한다. 다음으로는 핵 개발에 관해 한국 정부가 전략적 모호성과 불투명성을 취해야 한다. 즉 대통령은 “점증하는 북한의 핵실험을 인내심을 갖고 보고 있다” 정도로 대꾸해야 했고, CNN 특파원이 보충 질문을 하면 더 모호하고 불투명한 연기를 피워야 했다.
핵무장에 대한 오해는 산더미 같다. 핵무장은 자주국방의 일부일 뿐, 자주국방을 완수해 주지 못한다. 동맹 없이 자주국방을 완수한 나라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없다. 또 핵무장은 나라의 부강이나 번영과도 무관하다. 구 소련은 1978년부터 핵무기 수에서 미국을 앞지르기 시작했지만 1991년 연방이 해체됐다. 핵무장 만능론도 문제이지만 그것만큼 곤란한 것은 도덕적으로나 현실적으로 한국의 핵무장은 절대 상상할 수조차 없다는 불가론이다. 국제정치에는 절대란 단어가 없고 조건만 있다. 어떤 조건에서 한국은 핵무장을 선택하지 않을 수밖에 없게 되는가? 이 질문은 똑같이 이상주의적인 핵무장론(만능론)과 불가론 모두를 배격하고, 우리가 당면한 북핵과 동맹이라는 현실을 고심하게 해 준다. 김재엽의 ‘한국의 핵무장’(살림, 2017)을 독자들께 권한다.
장정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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