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모 칼럼]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또는 팩트풀니스

입력
2020.01.21 18:00
운 좋게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우리는 평화를 원한다. ©게티이미지뱅크

고3 딸아이가 수시와 정시 입시를 모두 마치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내 인생 책을 권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다. “내 평생 읽은 책 중에서 가장 중요한 책”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 책은 뭘까? 빌 게이츠는 2011년에는 스티븐 핑커의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를 인생 책으로 꼽았다. 두껍다. 1,406쪽. 곧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딸에게 “너도 한번 읽어 봐”라고 말할 엄두가 안 난다. 부녀 사이의 애정에 금이 가기 딱 좋은 일이다.

평소에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를 내 인생 책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연초 술자리에서 갑자기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안동 한국국학진흥원의 철학자 이상호 박사가 던진 말 때문이다. “우리는 전쟁을 경험해보지 못한 세대예요.” 한반도에 살았던 사람들 가운데 이런 행운을 가진 사람이 몇이나 될까? 여전히 휴전 중이기는 하지만 한국전쟁은 사실상 1953년 끝났다. 고등학교 교육 과정에서 교련이 필수과목에서 선택과목으로 바뀌면서 교육 현장에서 퇴출된 게 1997년의 일이다. 대략 이때부터는 전쟁에 대한 일상적인 공포에서 벗어난 것 같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는 폭력에 대한 연구 성과가 드러난 책이다. 사람이 살다 보면 폭력이라는 수단에 빠지게 되는 때가 있는데, 폭력에 빠지지 않고 평화적인 해결을 지향하는 ‘나’를 어떻게 끄집어 낼 수 있는가를 알려 준다. 이게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 본성에는 선한 천사와 악한 악마가 있기 때문이다.

스티븐 핑커는 우리 본성 안에는 다섯 가지 악마가 있다고 한다. 도구로서의 폭력, 우세 경쟁, 복수심, 가학성, 그리고 폭력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가 그것이다. 악마의 결과가 전쟁과 살해 그리고 성폭행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매일 참혹한 뉴스를 본다. 하지만 인간이 날로 잔인해지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예전이 훨씬 더 잔혹했다. 로마의 군중들은 헐벗은 여인을 말뚝에 묶어 놓고 동물이 찢어 먹는 모습을 구경하며 신나했다. 지쳐 쓰러진 검투사에게 마지막 일격을 가하라고 엄지를 아래로 꺾으면서 소리쳤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이런 야만과 폭력은 없다. 중세 후기부터 20세기까지 유럽의 살인율은 50분의 1로 줄었다. 능지처참, 화형, 결투, 노예제가 사라졌다. 고문은 불법이며 채찍질 같은 가학적인 처벌은 극히 일부 국가에서만 행해진다. 여성, 어린이, 동성애자들에 대한 폭력도 줄었고 동물권리마저 옹호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스티븐 핑커는 우리 본성에 악마뿐만 아니라 네 가지 선한 천사가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남들의 고통을 느끼고 서로의 이해를 연결 짓는 감정이입, 충동적 행동의 결과를 예상하고 그에 따라 적절히 절제하게 하는 자기통제, 편협한 관점에서 벗어나서 더 나아질 방법을 찾게 하는 이성, 그리고 도덕감이 그것이다.

전쟁은 여전히 일어난다. 새해 벽두부터 전쟁 관련 소식이ᅠ들려 왔다. 미국의 이란 공습과 이란의 반격 그리고 그 사이에 어처구니없게 일어난 우크라이나 민항기 격추 사건은 매우 불쾌한 일이다. 하지만 다행히 마무리되고 있다. 부족사회 시대나 중세 시대와 달리 우리 본성의 네 가지 천사가 활발히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안동의 철학자가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우리 세대’를 언급한 까닭이 아마 이것일 게다. 우리는 잘 깨닫지 못하지만 요즘 사람들은 예전보다 더 오래 살고, 유아기에 사망할 가능성이 더 낮고, 교육을 받을 가능성은 더 높고, 20년 사이에 극빈층은 절반으로 줄었다. 한국전쟁 이후 강대국 사이의 전쟁은 아직 한 번도 없었다. 지난 60여년 동안 전쟁의 수가 급격히 줄어 들고 전쟁이 일으킨 파괴력도 감소했다.

매일 보는 뉴스는 험악하다. 하지만 뉴스 제목이 아니라 숫자에 집중하면 희망이 보인다. 아직도 세상에서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있고 우리는 그것을 이뤄 내고 있다. 1960년에는 매년 2,000만명의 어린이가 죽었는데 이제는 그 수가 800만으로 줄었다. 우리가 옳은 일을 한다면 그 숫자를 400만, 200만으로 줄일 수 있다.

대학 입시 결과를 기다리는 딸에게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대신 한스 로슬링의 ‘팩트풀니스’를 권하기로 했다. 세상이 우리 생각보다 괜찮다는 것을 숫자로 보여 주며 우리가 세상을 오해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책이다. 이 책도 473쪽이나 되지만 책 앞에 나오는 열세 문제를 푼 후 자신이 이 세계를 침팬지보다도 잘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순식간에 읽을 게 분명하다.

운 좋게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우리는 평화를 원한다. 그렇다면 네 가지 천사 가운데 누가 가장 중요할까? 사람들은 도덕을 가장 중요시 여긴다. “내가 착하게 행동하고 정의를 추구하면 세상은 평화로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람마다 정의와 도덕의 기준이 다르다는 게 문제. 따라서 도덕으로 정의를 추구하다 보면 오히려 나쁜 쪽으로 빠질 수 있다. 여기서 핑커는 말한다. “평화를 원한다면 정의를 추구하지 말고 평화를 추구하라.”

이정모 서울시립과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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