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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벌의 탄생, 대치동 리포트] ‘○○大 출신’ 말고 ‘뭘 할 수 있나’ 묻는 사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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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어느 학교 나왔니?” 묻지 마세요
<6> “어느 학교 나왔니?” 묻지 마세요
지난 13일 찾은 광주시 광주소프트웨어마이스터고는 겨울방학 중임에도 시끌벅적했다. 이날부터 기숙사에서 숙식하며 닷새간 진행되는 겨울전공캠프에 참가한 1ㆍ2학년 135명이 8개 교실을 가득 메우고 있어서다. 학기 중엔 배우지 못했으나 학생들 수요가 몰리는 과목을 정해 심화학습을 진행하는 것인데, 이번 캠프에선 총 8개 과목이 개설됐다. 안드로이드 애플리케이션(앱) 프로그래밍, 아이폰(iOS) 앱 프로그래밍, 머신러닝, 인공지능(AI) 프로젝트 등이다. 수업은 오전 8시40분 1교시를 시작으로, 오후 9시20분(11교시)에야 끝나는 강행군이다.
이달 초 공학기술용 소프트웨어 개발회사 마이다스아이티에 취업을 확정 지은 이 학교 2학년생 양현승(19)군도 캠프에 나와 안드로이드 앱 프로그래밍 수업을 들었다. 그는 졸업 후 회사로 출근하게 된다. 양군은 “학교 초청으로 마이다스아이티 사장이 강연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소프트웨어 분야는 실력만 있으면 대학에 갈 필요가 없다’는 말씀을 듣고 학력 편견 없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곳이겠구나 싶었다”라며 “남은 1년 동안 회사업무에 필요한 역량을 키우는데 집중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어 “고졸 개발자가 아니라 그냥 개발자로 보여 지고 싶다”고 덧붙였다. 양군은 1학년이던 2018년 전국 소프트웨어마이스터고 3곳 학생들이 모여 실력을 겨루는 ‘소프트웨어 마이스터고 연합 해커톤’에서 컴퓨터 언어로 코딩을 쉽게 배울 수 있도록 한 게임을 선보여 최우수상을 받은 인재다. 양군 외에도 2학년생 4명이 카카오페이와 손잡은 개인 간 거래(P2P) 금융기업 피플펀드, 중형 축전지 세계 시장 점유율 30%의 비나텍에 각 2명씩 취업했다.
다음 달 삼성SDI로 출근하는 이 학교 3학년 허단비(20)양도 “여러 경험과 실무 지식을 미리 쌓을 수 있다는 건 마이스터고의 큰 장점”이라며 “출신 꼬리표 없이 온전히 실력으로만 평가하는 사회 분위기가 좀 더 확산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허양은 중소벤처기업부와 SK플래닛, SK텔레콤 등이 공동 주관하는 2018년 ‘스마트앱 챌린지’에서 ‘당신도 요리할 수 있다’는 의미를 담은 ‘유캔쉐프’ 앱을 만들어 미래산업부문 특별상을 받았다. 해당 앱은 보통 1인용 또는 4인용이 기준인 요리 레시피를 2~3인용이나 더 많은 사람이 먹을 음식 조리에 쓸 때 각 식재료의 양을 어떻게 하면 되는지 알려준다.
올해 첫 졸업생을 배출한 광주소프트웨어마이스터고의 졸업생 72명 중 63명(87.5%)이 삼성SDI와 한전KDN, 한글과 컴퓨터 등 유수 기업에 취업했다. 어디 출신인지를 중요시 여기는 사회에서 무얼 할 수 있는지 묻는 사회로 조금씩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나재희 교무부장은 “대학 졸업장이 없다는 색안경을 끼고 실력 쌓기에 힘써 온 학생들을 바라본다면 학생도, 기업도, 우리 사회도 모두 손해”라고 강조했다.
◇블라인드 채용으로 지방ㆍ여성 인재 늘어
교육제도와 채용방식 등 여러 부문에서 학벌사회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동시다발적으로 이뤄지면서 굳건했던 학벌의 장벽에도 작게나마 금이 가고 있다. 기업 10곳 중 6곳이 “신입사원 채용에 학벌은 중요하지 않다”고 답변(2018년 구인구직 플랫폼 사람인 조사)했을 정도. 조기숙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대입성적이 평생을 좌우하는 학벌사회에선 미래희망을 꿈꿀 수 없다”라며 “학벌의 문턱 앞에서 좌절과 체념을 경험한 다수가 노력의 끈을 놓으면 우리 사회 경쟁력은 하락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학벌사회는 반드시 극복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현재 학벌사회에서 능력사회로 가장 빨리 전환하고 있는 곳은 사원들의 실력이 곧 경쟁력으로 통하는 기업이다. 많은 기업이 신입 사원 선발에서 다양한 무(無)스펙 전형을 운영한다. 2015년부터 ‘열린채용 스펙(SPEC)태클 전형’을 실시하는 롯데그룹은 이력서와 자기소개서 없이 실제 직무와 밀접한 과제(포트폴리오)로만 신입 사원을 선발한다. 현대백화점그룹도 ‘워너비 패셔니스타’라는 스펙 타파 오디션을 진행하고 있다. SK텔레콤 등 SK그룹 일부 계열사, CJ, 두산중공업, KT, 종근당 등은 응시자의 정보를 토대로 평가하지 않는 블라인드 채용을 도입했다.
지난해 SK텔레콤 하반기 신입사원 채용에 합격한 김예린(25)씨는 스스로 “블라인드 채용의 수혜자”라고 말했다. 지방 국립대를 나온 김씨는 토익 점수도 없고 학점도 3.5점(4.5점 만점)으로 높지 않다. 그는 “4학년 때 대학원 통신연구실 인턴으로 있으면서 배운 지식과 2년 간 이전 회사에 다니며 키운 업무역량을 강조한 게 도움이 됐다”고 설명했다.
2018년 한양대 산학협력단이 한국산업인력공단에 보고한 ‘편견 없는 채용, 블라인드 채용 실태조사 및 성과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공공기관 260곳에서 선발한 서울대와 연세대, 고려대 출신 신입사원 비율은 블라인드 채용 이전(2015년~2017년 상반기)엔 15.3%였으나, 도입(2017년 하반기~2018년 상반기) 후 10.5%로 줄었다. 반면 같은 기간 비수도권 대학 출신 비율(38.5%→43.2%), 여성의 비율(39.8%→43.1%), 지역인재 비율(18.5%→21.99%)은 늘었다. 앞서 2017년 6월 문재인 대통령은 공공기관 채용시 블라인드 채용을 의무화했다. 조기숙 교수는 “여러 부류의 재능 있는 사람을 뽑아 다양성이 높아질수록 그 조직은 경쟁력을 갖게 된다”고 설명했다.
마이스터고를 만들고 국가직 지역인재 9급 고졸 채용비율(2018년 기준 7.1%)을 2022년 20%까지 늘리기로 한 고졸자 채용 확대 정책이나 공공기관의 지역인재 할당 선발, 국회에 계류 중인 출신학교차별금지법 제정안도 학벌사회를 극복하려는 노력이다. 남기곤 한밭대 경제학과 교수는 “지방대 졸업생이나 고졸 취업자를 우대한다는 역차별 논란 역시 학벌사회에 금이 가면서 불거진 현상”이라고 말했다.
◇국립대 통합네트워크 대안으로 주목
전문가들은 학벌사회 극복을 위해선 보다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조기숙 교수는 “블라인드 채용이나 지역인재 할당은 썩은 물(학벌사회)을 잠시 맑게 하는 정수기”라며 “학벌의 출발점인 입시 제도를 개편해 서울대의 독점적 지위를 없애지 않는 한 학벌사회 타파는 요원하다”고 지적했다.
김종영 경희대 사회학과 교수는 “서울대 한 해 예산이 8,000억원, 연세대와 고려대가 5,000억원, 부산대 3,000억원, 전남대 2,300억원 정도”라며 “지방 국립대 재정 지원을 통해 교육ㆍ연구의 질을 끌어올린 다음 서울대와 통합ㆍ운영하면 미국처럼 전국에 좋은 대학이 퍼져 있게 된다”며 “우수 인재들의 서울 집중 현상을 막고 지역 활성화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앞서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 시절 이 같은 내용을 골자로 한 국립대 통합네트워크를 공약으로 내놨었다.
남기곤 교수는 “수도권과 지방간의 교육 여건 격차, 능력 향상 기회 부족 등을 해소해 대학을 다니는 동안 지역 인재들이 실력을 키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광주ㆍ세종=변태섭기자 liberta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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