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우 칼럼] 워런은 왜 샌더스를 이기지 못했나

입력
2019.12.31 18:00

두 진보후보의 처지가 역전

미국 민주당 경선의 이변 중 하나

진정성의 덫이 현대정치의 변수로 부상

미국의 정치 잡지 자코뱅 최근호의 표지. 붉은 유니폼의 버니 샌더스 의원과 푸른 유니폼의 엘리자베스 워런 의원이 사이클 경주를 벌이고 있다. 마이클 바이어스 작.

‘런 워런 런 (Runwarrenrun.org)’이란 온라인 정치운동이 있었다. 2016년 미국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민주당 외곽단체와 진보운동가들이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의 출마를 촉구하기 위해 결성해 후보가 없는 상태에서 열성적인 선거운동을 했다. 경제 불평등을 해결할 정치인은 워런 의원밖에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그가 끝내 출마를 피했을 때, 회원들은 무소속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에게 지지를 모았다. 하지만 70세가 넘고 그다지 눈에 띄지 않던 노정치인은 어디까지나 워런의 대안이었다.

4년이 지난 지금 위치가 역전됐다. 경선 투표시작을 30여일 앞둔 상태에서 샌더스는 조 바이든 전 부통령에 맞설 진보의 대표주자다. 3위로 내려앉은 워런이 다시 부상할 것으로 예측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그만큼 세를 잃었다. ‘좌익 지식인의 목소리’라는 미국 잡지 자코뱅의 표지가 두 사람의 위치를 보여 준다. 사이클 선수로 묘사된 그림에서 샌더스는 진보후보를 상징하는 붉은색 유니폼을, 워런은 바이든과 함께 기득권후보를 상징하는 푸른색 유니폼을 입고 달리고 있다. 선거운동 초반에는 샌더스가 사퇴하고 워런으로 진보가 단일화하는 시나리오가 당연시됐다. 지금은 명분도 없다. 모닝컨설트 조사에 따르면 트럼프 타도의 열쇠를 쥔 두 집단, 오바마를 찍고 트럼프를 찍은 사람들 (Obama-Trump voters), 2012년 오바마를 찍고 2016년엔 투표하지 않은 사람들 (Obama-nonvoters)에서 워런의 지지율은 현저하게 낮다.

이같은 이변 때문에 선거에 미치는 진정성(Authenticity)이란 변수를 놓고 흥미로운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정치에서 진정성이란 한마디로 유권자가 정치인을 진짜로 보느냐, 또는 가짜로 여기느냐는 판단 기준이다. 트럼프를 비롯한 포퓰리스트들이 예상을 뒤엎고 선거에서 승리하는 일이 이어지면서 수수께끼 같은 이 변수의 실체가 주목을 끈다. 철학 등 인문학에서는 이 말이 본래성(本來性)이라고 번역돼 더 알쏭달쏭하다. 루소에게 진정성은 사회에 오염되기 전 인간의 자연스러운 상태였고, 인문학자 레오나드 트릴링은 사회적으로 피해를 입더라도 자기 내면의 있는 그대로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했다.

반면 정치에서 진정성은 실제 내면이 어떻든 유권자에 어떻게 보이느냐가 중요하다. 가령 모내기를 마치고 막걸리를 마시는 박정희, 밀집모자를 쓰고 손녀딸을 자전거에 태운 노무현은 진정성의 단면이다. 그렇다고 서민적이란 것과 같지 않다. 단순히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과도 다르다. 정치적 진정성은 유권자와의 관계로 결정된다. 그래서 ‘진정성 있는 거짓말쟁이’란 우스꽝스러운 상황이 나타난다. 트럼프는 기록적인 거짓말쟁이이고, 인종차별, 성차별적인 말을 거듭하지만 유권자들은 도리어 가짜가 아니라고 여긴다. 민주당의 스타 알렉산드라 오카시오-코테즈는 “트럼프 시대에 실업률이 떨어진 것은 임금이 낮아 먹고살기 힘든 사람들이 투잡을 뛰기 때문”이라는 역대급 망언을 해도 진정성에서 높은 점수를 받는다.

이 때문에 진정성은 유권자의 위선이란 해석도 나온다. 유권자가 후보를 싫어하는 이유는 성차별, 인종문제, 부와 경력에 대한 시기, 혐오 등 따로 있다는 것이다. 그래도 그렇게 치부하기엔 입증된 진정성의 위력이 크다. 소셜미디어로 정치지도자를 직접 알게 되고, 또한 지도자들이 자신을 배신할 것이란 불안감이 커지면서 선거의 문화가 바뀌고 있다는 해석이 더 설득력이 있다. 워런은 샌더스와 차별화하기 위해 중산층 증세없이 전면의료보장을 이루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추락을 시작했다. 이후 부자로부터 모금, 대기업을 변호한 경력, 자녀를 사립학교에 보낸 일이 연이어 폭로되고, 교수취업 때 인디언 혈통을 선언한 일과 엮이면서 ‘가짜의 덫’에 갇혔다. 힐러리는 낙선 후 쓴 책에서 “진짜가 되는 것 (being real), 우습게만 여기던 진정성이란 말이 미래의 가장 중요한 선거를 좌우하게 됐다”고 썼다. 어울리지 않는 삭발을 떠올리고 민주 건달이란 질책을 상기하면 이 변수가 우리 선거에서 힘을 발휘 못할 이유를 찾기 어렵다.

유승우 뉴욕주립 코틀랜드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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