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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월급 7만원이 14세 여성의 임금이던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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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 80년대 한국 경제의 고도 성장기. 누군가는 지도자 덕이라고도 하고, 다른 누군가는 회장님 덕이라고도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산업역군들 덕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이 모든 걸 가능케 했던 이는 ‘여공(女工)’이었다. 밖으로 장시간 저임금 노동을 버텨내면서 안으로 살림을 살아낸 이들이 아니었다면 한국 고도성장의 신화란 불가능했다.
1970년 11월 13일 동대문 평화시장 재단사였던 전태일이 제 한 몸을 불사르며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친 것도, 따지고 보면 봉제공장의 여공들을 위해서였다. 여공들이 제 손을 바늘로 찔러가며 졸음을 쫓아내면서 하루 14시간씩 일하고 손에 쥐었던 일당은 겨우 50원. 당시 커피 한 잔 값에 불과했다. 보조에 불과하다는, ‘시다’라는 멸칭까지 감수해야 했다. 전태일은 그런 현실을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2020년 ‘전태일 50주년’을 맞아 여공들을 한국 현대사의 주인공으로 다시 불러내는 작업이 진행 중이다. 서울 관수동 전태일기념관에서 20일부터 시작하는 ‘시다의 꿈’ 전시다. 이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작가 이주란이 ‘현역 여공’ 박경미를 만나 소설 ‘어른’을 내놨다.
강원 정선에서 나고 자란 박경미는 열여덟 되던 1985년쯤 서울 장충동 신라호텔 옆 봉제공장 여공이 됐다. 한 달에 받아 쥐는 돈은 7만원. 밥값을 빼면 5만5,000원 정도였다. 그때 중견기업 과장급 월급은 50만원 가량이었으니, 10분의 1을 간신히 넘는 수준이었다. 야학에서 근로기준법을 배웠고, 전태일의 뜻을 이은 청계피복노조에서 활동했다. 지금도 신당동에서 일한다.
그래서 소설은 한 시절 고생 진탕한 얘기만 가득할 것 같지만, 의외로 유쾌하고 발랄하다. 이주란 작가는 박경미를 통해 본 전태일에게서 배울 것은 ‘유쾌함’이라 봤다. 상대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유쾌함이다.
‘이주란-박경미’ 외에도 ‘조해진-김경선’ ‘정세랑-장경화’ ‘최정화-홍경애’ 등 ‘작가-여공’ 세 커플도 함께 소설을 썼다. 전태일기념관은 소설뿐 아니라 소설쓰기 과정까지 모두 전시한다. 지난 19일 이주란 작가와 박경미 여공을 전태일기념관에서 만났다.
한소범 기자 beom@hankookilbo.com
이현경 PD bb8@hankookilbo.com
한설이 PD ssolly@hankookilbo.com
현유리 PD yulssluy@hankookilbo.com
전혜원 인턴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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