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얼굴의 배임] “기업 지배구조 개선ㆍ배임죄 폐지 묶어서 처리” 목소리 커져

입력
2019.12.11 14:00
수정
2019.12.12 00:52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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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섭 “기업 외부 감사ㆍ견제 등 개선 땐 배임죄 전면 폐지”

금태섭 더불어민주당 의원. 오대근 기자
금태섭 더불어민주당 의원. 오대근 기자

법 조항의 모호함 탓에 표적 수사에 활용되며 기업과 공직사회를 얼어붙게 해온 배임죄는 6년 전부터 법 개정이 시도됐지만 답보 상태다. 보수 정당은 법안만 발의한 뒤 사실상 무관심했고, 진보 정당은 ‘재벌 봐주기 아니냐’는 반대 여론을 의식한 나머지 철저히 외면한 데 따른 결과다. 그러나 배임죄 덫에 걸린 무고한 피해자들이 끊이지 않는데다 검찰개혁 요구와 맞물려 여당에서도 배임죄를 그대로 둬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가 조금씩 나오고 있다.

여당에선 ‘배임죄 개정은 재벌 편 들어주는 것’이란 분위기가 아직 지배적인 가운데 금태섭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기업 지배구조 개선을 전제로 배임죄 전면 폐지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을 처음으로 밝혔다. 금 의원은 한국일보와 전화 인터뷰에서 배임죄에 대한 소신을 감추지 않았다. 그는 “배임죄는 외국에는 거의 없는 매우 특유한 법”이라며 “어디까지가 배임이고, 어디까지가 기업의 경영상 판단인지 애매한 지점이 있어 기업활동을 억압한다는 비판이 나온다”고 말했다. 이어 “담보를 잡지 않고 대출이나 투자를 해주면 배임죄로 처벌될 수 있어서 우리나라는 (다른 선진국과 달리) 투자은행(IB)이 발달할 수 없었다는 얘기도 있지 않느냐”고 지적했다.

검사 출신인 금 의원은 배임죄가 표적 수사에 이용되는 현실도 인정했다. “검찰이 노사문제에 개입하려 할 때 사용하는 게 업무방해죄이고, 기업경영에 개입할 때는 배임죄를 쓴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국회에 발의된 개정안 정도로는 배임죄 폐해를 바로잡기 어렵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금 의원은 “(배임죄를 존치한 채 면책 사유만 추가하면) 검찰이 어차피 ‘면책 사유에 해당 안 된다’며 기소해 버릴 것이기 때문에 큰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며 배임죄를 아예 없애는 방안을 거론했다.

물론 단서는 있다. 금 의원은 “다른 나라는 배임죄도 없지만 우리나라 같은 재벌 문제도 없다”면서 “재벌들이 계열사 돈을 다른 계열사에 쓰거나 2,3세 승계를 위해 계열사를 동원하는 상황에서 당장 배임죄를 없애면 공백이 생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보완장치 없이 배임죄부터 폐지하면 또 다른 부작용이 생길 거란 우려다.

그가 생각하는 해결책은 “기업 오너가 적은 지분으로 그룹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것을 막고 기업 내부의 견제장치와 외부 회계감사를 투명하게 하는 장치가 마련된다면 배임죄가 필요 없다”는 것이다. 기업 지배구조 개선과 배임죄 폐지를 한 번에 묶어서 처리하는 방법을 국회가 생각해 볼 수 있다는 취지다.

자유한국당은 소속 의원들이 19, 20대 국회에서 배임죄 개정안을 잇달아 내놓는 등 배임죄 문제에 민주당보다 관심이 많았다. 한국당이 지난 9월 내놓은 ‘민부론’에도 ‘기업 경영에 있어서 경영판단 존중의 원칙을 확립하고 배임죄 적용을 엄격하게 하도록 법률을 개정한다’는 목표가 담겨있다. 문제는 우선 순위에서 한참 밀려 있다는 점이다.

김종석 자유한국당 의원. 고영권 기자
김종석 자유한국당 의원. 고영권 기자

민부론 발간 실무를 담당한 김종석 한국당 의원은 한국일보 인터뷰에서 “당이 중점 법안으로 지정해서 원내 지도부가 여당과 협상할 때 이 법을 우선적으로 다루자고 해야 (배임죄 개정안이) 쟁점 법안이 될 수 있는데, 이 법이 그 동안 (한국당에서) 그런 대접을 받지 못한 것 같다”고 인정했다.

그는 “기업 투자란 성공할 수도 실패할 수도 있는데, 실패했다고 형사처벌을 한다면, 어느 기업인이 투자를 하겠냐”며 “배임죄 개정안이 당에서 주요 법안으로 대접 받아야 할 가치는 충분히 있는 만큼, 공론화를 위해 노력해보겠다”고 밝혔다.

배임죄 개정안은 2013년 국회에 처음으로 제출됐다. 이명수 당시 새누리당 의원은 ‘경영판단 원칙’을 상법에 넣자는 내용의 개정안을 냈다. 경영자가 선의로, 숙고 끝에 내린 경영상 결정은 결과적으로 회사에 손해를 끼친다 해도 배임으로 보지 않는다는 면책 조항을 법에 명시하는 게 골자이다. 같은 당 정갑윤 의원도 2015년 ‘명백히 회사에 손해를 가할 목적’이 있는 경우만 배임죄로 처벌하자는 내용의 형법 개정안을 냈다. 그러나 두 개정안은 한 번도 국회 상임위원회 문턱을 넘지 못한 채 19대 국회가 끝나면서 함께 폐기됐다.

20대 국회 들어서는 자유한국당 권성동ㆍ윤상직 의원이 각각 ‘경영판단 원칙’을 명시한 상법 개정안을 2017년과 2018년 잇달아 냈다. 그러나 국회 회의록을 보면, 법안을 발의한 의원들조차 배임죄 문제를 거론하지 않을 정도로 관심에서 밀려난 터라 이 개정안들도 20대 국회가 끝나면 함께 사라질 가능성이 커 보인다.

이성택 기자 highno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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