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스 프리즘] 계절 변화에 민감한 ‘우울의 굴레’… 마음도 월동 준비가 필요

입력
2019.11.26 19:00

김정진 서울성모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게티이미지뱅크

영국의 시인 T. S. 엘리엇(1888~1965)은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는 4월을 잔인한 달이라고 하였다. 감수성이 예민하고 우울한 사람에게 맑고 화창한 날씨는 자신 안의 어둡고 차가운 공기와 충돌하여 때로는 힘들게 느껴질 수 있다. 실제로 우리나라에서는 봄철 자살률이 가장 높은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애써 생명을 키워내는 봄과 마찬가지로 땅이 죽어가는 가을도 어떤 사람에게는 매우 힘든 계절이다. 해가 짧아지고 낙엽이 떨어지고 스산한 바람이 불면 누구나 마음 한편이 서늘해진다. 우리나라도 사계절이 뚜렷해 우울증을 앓거나 우울한 성향이 있는 사람은 계절의 변화에 민감하고 환절기에는 증상이 나빠지는 것을 경험한다. 겨울철 우울증은 봄철 자살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아 주의가 필요하다.

우울증이 가을과 겨울에 특히 심하게 나타나면 계절성 우울증이라고 한다. 겨울에 일조량이 적은 북유럽에서 많이 나타나는 질환으로 알려져 있고 다양한 증상을 보인다. 무기력하고 몸이 무거워지며 식탐이 늘거나 시도 때도 없이 잠이 쏟아지기도 한다. 겨울만 되면 사람들도 잘 안 만나고 곰처럼 겨울잠을 잔다는 얘기를 들어본 사람은 한 번쯤 계절성 우울증을 의심해 볼만하다.

그럼 우울하다는 것은 무엇이고 어떻게 표현하나. 사전적으로는 근심스럽거나 답답해 활기 없는 상태를 뜻한다. 실제로는 공허감 불쾌감 분노 슬픔 절망 등 거의 모든 부정적 감정을 포함한다.

우울은 고통스러운 기억, 지금 힘들게 하는 문제, 절망적으로 느껴지는 미래를 먹이 삼아 불가사리처럼 몸집을 키우고 마음에게 들러붙는다. 마음의 병을 일으키고 시간이 지날수록 온 몸의 신경을 교란해 다양한 증상과 병을 일으킨다.

“기분이 가라앉는다. 또 다시 깊은 물 속에 가라앉는 느낌이 엄습한다. 희미한 빛만 남은 물 속은 얼음장처럼 차갑다. 생명체는 나 밖에 없고 시간조차 알 수 없다. 어둠 속을 헤매다 육중한 바위 틈에 끼어 발버둥쳐도 꼼짝할 수 없다. 차라리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고 죽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든다.”

우울증 환자가 표현하는 우울할 때 느낌의 일부다. 감정의 밑바닥에 갇혀 옴짝달싹 못한다고 느낀다. 그러한 감정 상태가 가장 진실되다고 판단하는 게 사실은 더 큰 문제다.

우울증이 생기면 자기 혐오와 반성에 빠지고 생각을 되새김질하게 된다. 예를 들어 너무나 진지하게 삶의 의미에 대해 하루 종일 생각한다. 어차피 답을 알 수 없는 질문이므로 결국 삶은 의미가 없다는 생각으로 진행된다. 그리고 이러한 결론 없는 질문에서 좀처럼 빠져나올 수 없다. 내가 우울한 게 아니라 우울이 나를 가지고 노는 모양새다.

우울증이라는 늪에 빠지면 천하장사도 어쩔 수 없다. 혼자 힘으로는 빠져 나오기 어렵다. 허우적댈수록 점점 깊이 빠져들 뿐이다. 가벼운 우울감과 달리 우울증의 우울감은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벗어날 수 없다. 우울증을 심하게 앓은 사람들은 “차라리 몸이 아픈 게 낫다”고 말한다. 일리 있는 말이다. 그 고통의 크기는 심한 육체적 질병보다 결코 작지 않고 겪지 않으면 가늠할 수도 없다.

이글스의 유명한 노래 ‘호텔 캘리포니아’에는 ‘We are all just prisoners here, of our own device(우리 모두 스스로의 굴레에 갇힌 죄수들이다)’라는 가사가 나온다. 호텔 캘리포니아는 존재하지 않은 가상의 공간이다. 사람들은 모두 크고 작은 본인만의 가상의 굴레를 가지고 있다.

우울증은 그 굴레를 본인의 일부로 받아들여 체념하게 만들거나 혼자 힘으로 버티다가 지쳐 쓰러지게 만든다. 이럴 때는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에게 구조 요청을 하는 것이 가장 좋다. 물론 그렇게 되기 전에 마음의 건강을 챙기면 더 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다.

11월이 지나가고 있다. 몸의 건강을 위해 겨울철 먹거리를 미리 준비하듯 마음의 월동 준비도 하는 건 어떨까.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얼마든지 마음을 건강하게 만드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 건강한 겨울을 보내고 내년에는 마음까지 따뜻한 봄을 맞이하자.

김정진 서울성모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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