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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 칼럼] 좌파 ‘빅텐트’를 위하여

입력
2019.11.13 18:00
수정
2019.11.13 18:10
29면
“좌파 포퓰리즘은 민주주의가 회복되어 다시 심화되고 확장되기를 원한다. 좌파 포퓰리즘 전략은 과두제라는 공동의 적과 맞서는 ‘우리’ ‘대중’을 구성하기 위해 민주주의 요구들을 집합 의지로 연합시키려 한다. 이것은 노동자, 이민자 그리고 불안정한 중산층은 물론 LGBT 공동체의 요구들과 같은 또 다른 민주주의 요구들과 함께 등가사슬을 형성해야 한다. 목적은 민주주의의 급진화를 가능하게 할 새로운 헤게모니를 창출하는 것이다.” ©게티이미지뱅크
“좌파 포퓰리즘은 민주주의가 회복되어 다시 심화되고 확장되기를 원한다. 좌파 포퓰리즘 전략은 과두제라는 공동의 적과 맞서는 ‘우리’ ‘대중’을 구성하기 위해 민주주의 요구들을 집합 의지로 연합시키려 한다. 이것은 노동자, 이민자 그리고 불안정한 중산층은 물론 LGBT 공동체의 요구들과 같은 또 다른 민주주의 요구들과 함께 등가사슬을 형성해야 한다. 목적은 민주주의의 급진화를 가능하게 할 새로운 헤게모니를 창출하는 것이다.” ©게티이미지뱅크

조국 사태에 대한 필자의 입장은 이 지면에 쓴 8월 22일과 9월 5일 자 칼럼에 암시되어 있다. 두 글을 통해 나는 조국 법무부 장관 지명자가 “100m 달리기에서 자신들의 자녀들만 50m 앞에서 출발할 수 있는 조건에 대해 무책임”하다는 것과, 사회가 진보하기 위해서는 습관적인 과도기 담론을 뛰어넘는 “도약”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진부한 이야기다.

입바른 소리가 특기인 좌파일수록 수행적 모순을 벗어나기 힘들다. 골목 상권이 살아나야 한다면서도 서른 개들이 휴지를 사야할 때는 대형 마트를 애용하고, 청년 창업을 도와야 한다면서도 동네 커피숍보다는 여러 모로 편리한 스타벅스를 찾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조국 사태 같은 것이 날 때마다 보수 논객들은 특권층에게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주문하지만, 민주공화국의 시민은 그런 걸 받아먹는 거지가 아니다. 무엇보다 보수주의자들이 놓친 핵심은, 부와 권력에 가까이 다가간 특권층일수록 그가 저지를 수행적 모순의 범주와 규모도 비례한다는 것이다. 이제 ‘강남 좌파’는 잊자.

서초동의 시위자들 가운데는 ‘조국 수호’라는 구호에 침묵하고, ‘검찰 개혁’만 따라 외친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도 ‘좌좀’은 이들에게 ‘멍청이, 파시스트, 노예’라는 딱지를 붙인다. 현장에서 분투하는 활동가는 절대 대중과 척지는 저런 언사를 쓰지 않지만, 펜대나 굴리는 먹물은 이 기회를 틈타 자신의 급진성을 과시한다. 물론 시위자들 중에 “촛불집회에 노동조합 깃발이 안 보이니 상쾌하다”던 이들도 있었다. 이 사례에 대한 무난한 해석은 ‘백만 명 속에는 별의 별 사람이 다 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저런 시치미는 좌파에게 현실을 더욱 바로 보지 못하게 용수를 씌우는 것이다. 이 계제에 대중의 의식이 왜 개별 노동자에 대한 연민과 노동조합에 대한 불신으로 찢겨 있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저 간극을 메우지 못하면 노동조합은 조만간 사멸한다.

2018년 7월 23일, 현직 국회의원이었던 노회찬 정의당 의원이 자살했다. 그는 민주노동당 의원이었던 2005년 8월 18일, 삼성의 뇌물을 받은 정황 증거가 확실한 7명의 검사 명단을 실명 공개했다. 이 범죄자들은 문자 그대로 목이 잘려야 했으나 털끝 하나 상하지 않았고, 비리를 고발했던 노 의원만 통신비밀법 위반죄로 의원직을 박탈당했다. 그런 일이 없었다면 노 의원이 생계비에 쪼들려 수상쩍은 정치후원금을 받을 일도 없었다. 서초동의 시민은 검찰 개혁을 바란다.

산업화는 우파가 만들고 민주화는 좌파가 만들었다고들 하지만, 역사적 사실은 그와 다르다. 산업화는 이병철이나 정주영 같은 자본가들이 아니라 무수한 전태일들의 희생으로 이룩됐고, 민주화는 더 잘 살면서 권력까지 얻고픈 대중의 염원이 이룩했다. 박정희ㆍ전두환 군부 독재를 끝장낸 것은 권력과 자본을 없애자는 대중의 좌파적 정동이 아니라, 독재 정권이 독점했던 권력과 부를 내 것으로 만들려는 중산층 대중들의 우파적 정동이었다. 프랑스혁명이 부르주아들의 상퀼로트(노동계층)에 대한 제압으로 마무리되었듯이,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의 주역이었던 중산층 대중은 같은 해 7~9월 사이의 노동자 대투쟁을 외면했다.

대중들의 우파적 정동은 특권층과 대중이 권력과 부를 사이좋게 나눌 게 있을 때 흥기했다. 하지만 분배가 멈춰버린 1%만을 위한 원더랜드(wonderland)에서는 좌파적 정동과 대중이 손잡을 때가 찾아온다. 샹탈 무페는 ‘좌파 포퓰리즘을 위하여’(문학세계사, 2019)에서 이렇게 말한다. “좌파 포퓰리즘은 민주주의가 회복되어 다시 심화되고 확장되기를 원한다. 좌파 포퓰리즘 전략은 과두제라는 공동의 적과 맞서는 ‘우리’ ‘대중’을 구성하기 위해 민주주의 요구들을 집합 의지로 연합시키려 한다. 이것은 노동자, 이민자 그리고 불안정한 중산층은 물론 LGBT 공동체의 요구들과 같은 또 다른 민주주의 요구들과 함께 등가사슬을 형성해야 한다. 목적은 민주주의의 급진화를 가능하게 할 새로운 헤게모니를 창출하는 것이다.” 계급 개념에 몰입하지 말고 ‘빅텐트’를 치라는 말이다.

장정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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