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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hind&] 400년 전의 테러리스트 가이 포크스, 저항의 가면으로 살아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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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을 쓰는 순간 ‘그’는 우리가 되고, 우리는 ‘그’가 된다. 가면을 쓴 사람의 정체는 중요하지 않다. 가면이 상징하는 것은 육신에 갇혀 있는 하나의 생명이 아닌 무한한 가치, 사상과 신념이다. 400여년 전 영국에서 역모죄로 처형당한 ‘가이 포크스(Guy Fawkes)’는 수 세기를 지나 저항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원조’ 포크스는 무정부주의도 민주주의도 아닌 가톨릭 왕정 수립을 위해 싸웠지만, 그의 모습을 본뜬 가면은 무정부주의를 추구하는 해커 집단 ‘어나미머스(Anonymous)’의 상징이기도 하고 홍콩 민주화 시위에 등장하기도 한다.
포크스는 1605년 11월 5일 영국 의회를 폭파시켜 국왕 제임스 1세를 암살하려다 적발돼 다음 해 1월 31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영국은 제임스 1세의 2대 전 국왕인 헨리 8세가 수장령을 선포하며 교황청 중심의 구 가톨릭 체제에서 이탈했다. 성공회를 국교로 세운 것에 대해 가톨릭 신자들의 반발이 심했고, 일부 과격파는 국왕 암살까지 시도했다. 이중 가장 유명한 것이 포크스가 연루된 화약음모사건으로 국왕이 참석하는 상원 개회식에서 국가 지도층을 폭사시킨 후 혁명을 일으켜 당시 9살이었던 공주를 새 국왕으로 추대하는 대담한 계획이었다.
13명의 공모자 중 포크스가 가장 유명하지만 포크스가 주동자는 아니었다. 당시 계획은 의회 건물 지하실에서 대량의 화약을 폭발시켜 건물을 통째로 파괴하는 것이었는데 포크스가 화약 관리와 도화선 점화를 맡았다. 포크스는 당일 작전 개시를 위해 지하실에서 대기하던 중 밀고 받고 현장을 덮친 당국에 의해 체포됐다.
영국에서 기념하는 ‘가이 포크스의 날’은 바로 이 음모를 저지하고 국왕을 지킨 것을 축하하기 위해 시작됐다. 축하의 불꽃을 쏘아 올리고 헌 옷가지 등으로 포크스 인형을 만들어 들고 다니다 모닥불을 피워 불태운다. 이처럼 ‘공공의 적’과 같은 위치에 있던 포크스였지만 세월이 지나고 기성 정치 권력에 대한 불신이 깊어지자 포크스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정치 권력의 상징인 의회를 폭파시킨다는 단순하고 명쾌한 행위가 포크스에게 상징성을 부여했다.
현재 우리에게 익숙한 포크스 가면은 무정부주의자 ‘V’를 주인공으로 한 그래픽노블 ‘브이 포 벤데타’의 작가가 고안했다. 본래 가이 포크스의 날에 아이들이 직접 그려서 쓰고 다닌 가면에서 착안해 만든 것이다. 이를 원작으로 한 동명의 영화가 흥행하며 포크스 가면은 사람들 사이에서 저항의 상징으로 각인됐다. 이 저항의 가면을 해킹 집단 어나니머스가 2008년부터 상징으로 채택하며 포크스는 다시 저항운동의 중심에 섰다.
이후 2010년대에 들어서며 포크스 가면은 집회의 단골 소품이 됐다. 민주화 집회, 반정부 집회, 언론자유를 위한 집회 등 다양한 목적의 집회에 사용됐지만 모두 ‘저항’이라는 가치를 공유한다. 사람들은 가톨릭 왕정 수립을 원하던 한 사람으로서의 포크스보다 저항이라는 가치를 기억하기로 한 것이다. 1605년의 가이 포크스가 영국 왕정에 경종을 울렸듯이 2019년의 포크스 가면도 현 시대의 기성 권력에게 공포로 자리 잡았다.
이한호 기자 ha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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