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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레터] ‘국민 프로듀서’라더니 ‘기만쇼’… ‘프듀X’의 몰락

입력
2019.11.06 14:53
수정
2019.11.06 15:02

‘국민 프로듀서’ 개념 도입하며 흥한 오디션 프로그램

방송 제작진과 특정 기획사 간 유착 의혹으로 신뢰도 바닥

가수 연습생들이 지난 5월부터 7월말까지 방영된 엠넷(Mnet)의 오디션 프로그램 '프로듀스X101'에 출연한 모습. CJ ENM 제공
가수 연습생들이 지난 5월부터 7월말까지 방영된 엠넷(Mnet)의 오디션 프로그램 '프로듀스X101'에 출연한 모습. CJ ENM 제공

“국민 프로듀서님들, 당신의 가수에게 투표하세요.”

마이크를 잡은 진행자가 시청자를 부르는 호칭은 ‘국민 프로듀서’였습니다. 시청자가 직접 고른 가수 지망생이 진짜 가수가 될 기회를 잡는다고 했죠. ‘내 가수’를 만들기 위해 시청자들은 시간을 쪼개 실시간으로 본방송을 사수했고, 주머니를 털어 문자, 인터넷 투표를 하며 응원을 보냈습니다. 국민 프로듀서를 줄인 말인 ‘국프’라는 애칭도 생겨났죠. 나름의 사명감으로 가수 만들기에 애정을 갖고 참여한 시청자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는 제작진의 기만이었을까요.

음악 전문 채널 엠넷(Mnet)의 ‘프로듀스X 101(프듀X, 프듀 엑스)’가 특정 소속사와 유착해 투표 결과를 조작하는 등 ‘국민 프로듀서’를 속였다는 의혹이 제기됐습니다. 팬들은 ‘진상규명위원회’를 만들어 제작진을 고발했습니다. 프로그램을 담당한 PD 등 제작진들은 투표 조작 혐의로 구속됐고, 이 오디션 프로그램을 제작한 방송국은 경찰로부터 압수수색을 당하는 등 형사 사건으로 번졌습니다. 일각에서는 청년 세대의 꿈을 희롱한 ‘일종의 취업 사기’라는 비판도 나오는데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국민 기만쇼’의 시작은?

지난 7월 28일 종영한 엠넷 ‘프로듀스X101’이 투표 조작 의혹을 받고 있다. 엠넷 제공
지난 7월 28일 종영한 엠넷 ‘프로듀스X101’이 투표 조작 의혹을 받고 있다. 엠넷 제공

시작은 화려했습니다. 눈부신 조명 아래 쭈뼛거리며 등장한 가수 지망생, 연습생들. 이들은 전주 시작과 동시에 태도를 돌변해 진짜 가수 못지않은 실력을 뽐내며 시청자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습니다. 지난 2009년 엠넷의 ‘슈퍼스타K’는 첫 번째 시즌부터 성공신화를 만들었습니다. 이 방송을 통해 데뷔한 가수들이 승승장구하며 이들을 데뷔케 한 국민 프로듀서들도 내심 뿌듯했을 거예요.

이러한 시청자 참여형 공개 오디션 프로그램이 흥하자 엠넷은 2016년 ‘프로듀스 101’을 시도합니다. 무려 101명의 여성 가수 지망생들이 무대에 올라 매주 시청자, 국민 프로듀서들의 선택과 응원을 받아 가수가 되는 과정을 담은 프로그램이었죠. “이렇게 재능 있는 가수 연습생들이 많다니.” 국민 프로듀서들은 환호와 고심 끝에 열심히 투표했고, 그 결과 탄생한 아이돌 그룹 ‘아이오아이’가 성공하면서 이 프로그램 포맷은 굳어졌습니다.

엠넷은 이듬해 ‘프로듀스 101 시즌2’, 그 다음 해 ‘프로듀스 48’ 등을 통해 남성 아이돌 그룹과 한일합작 아이돌 그룹을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지난 5월 이번엔 ‘글로벌 아이돌 그룹’을 만드는 ‘프로듀스X 101’을 시작하는데요. 이 시즌의 특징 중 하나는 그간 시즌마다 불거진 투표 조작 의혹을 무마하기 위한 ‘X제도’를 신설한 것입니다. 마지막 1명을 뽑을 때는 10위 안에 들지 못한 가수 연습생 중 누적 투표수가 가장 높은 이를 발탁하는 제도였습니다. 바로 여기서 투표 조작 정황이 포착됐습니다. 시청자들은 “누적 투표수가 높았던 연습생들이 갑자기 생방송에서 투표수가 낮아지고, 반대로 누적 투표수가 낮았던 연습생들은 생방송에서 투표수를 많이 얻었다”며 해명을 요구했죠. 팬들은 진상 규명 위원회를 꾸려 제작진을 고발하기까지 이릅니다. 엠넷도 자사 제작진을 수사해달라고 경찰에 의뢰하며 논란은 ‘사건’이 됐습니다.

◇정치권은 왜 가세했는데?

“채용 사기다.”

‘프듀X’ 논란에 정치권도 목소리를 보탰습니다. 하태경 바른미래당 의원은 지난 7월 프듀X 투표 조작 의혹을 두고 “채용 비리, 취업 사기이고 민주주의 파괴”라고 비판하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습니다.

급기야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의 방송통신위원회 국정감사에서도 이 문제는 다뤄졌습니다. 노웅래 위원장은 “이번 방송 조작 사건은 오디션에 참가했던 모든 연습생의 꿈과 희망을 짓밟은 거대 취업사기이자, 시청자를 기만한 사기 방송”이라며 “경찰 수사와 별개로 방심위 차원의 신속한 행정조치가 이뤄져야 한다”고 다그쳤는데요.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이에 “우리도 대국민 투표 오디션 프로그램을 표방했던 방송이 시청자를 기만한 사안에 대해서는 매우 중하게 보고 있다며 “(투표 조작이 사실로 드러날 경우) 방송법 제100조 제1항에 따라 중한 제재와 과징금 부과도 가능할 것으로 판단한다”고 답했습니다.

하태경 의원은 지난 6일 ‘프로듀스X 국민감시법(방송법 일부 개정안)’을 발의한다고 밝혔는데요. 지상파 방송 3사와 종합편성채널 등에만 있는 ‘시청자위원회’를 프로그램 공급자(PP)인 엠넷에도 설치해 시청자의 감시 기능을 강화한다는 내용입니다. 하 의원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시청자위원회는 시청자들이 궁금해하면 방송국에 자료 요청이나 답변을 요구할 수 있다”며 “만약 엠넷에 시청자위원회가 존재했다면 이런 장난질을 치지 못했을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제작진은 어떻게 됐을까?

경찰이 '프로듀스X101' 투표 조작 의혹을 수사하기 위해 지난 5일 CJ ENM 사무실을 추가 압수수색했다.
경찰이 '프로듀스X101' 투표 조작 의혹을 수사하기 위해 지난 5일 CJ ENM 사무실을 추가 압수수색했다.

투표 조작 의혹을 해명하라는 시청자들의 요구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엠넷의 태도가 돌연 바뀐 건 지난 7월 26일입니다. 엠넷은 프로그램을 담당한 안모 PD 등 제작진에 대한 수사를 경찰에 의뢰했습니다. 경찰은 이후 엠넷 채널을 보유한 CJ ENM을 여러 차례 압수수색하고 ‘프로듀스101’ 시리즈에 출연했던 연예인이 소속된 연예기획사도 압수수색 했는데요. 이 과정에서 경찰은 투표 조작에 연관된 증거들을 확보했다고 알려졌습니다.

경찰은 또 지난 5일 안 PD와 등 제작진 3명과 연예기획사 관계자 1명 등 4명에 대해 사기와 위계에 의한 업무방해 등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는데요. 법원은 이중 김모 CP(총괄 프로듀서)와 안 PD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했습니다. 명재권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두 제작진에 대해 “범죄 혐의가 소명되고 사안이 중대하며, 현재까지의 수사 경과 등을 비춰봤을 때 구속의 사유와 필요성, 상당성이 인정된다”며 영장 발부 사유를 밝혔어요. 경찰은 수사 과정에서 제작진이 연예기획사와 금품 등을 거래한 정황도 포착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팬들이 분노한 이유는?

'프로듀스X 101' 안모 PD가 생방송 투표 조작 혐의로 구속 전 피의자 심문을 받은 뒤 5일 서울중앙지방법원을 나서고 있다. 고영권 기자
'프로듀스X 101' 안모 PD가 생방송 투표 조작 혐의로 구속 전 피의자 심문을 받은 뒤 5일 서울중앙지방법원을 나서고 있다. 고영권 기자

투표 조작 논란이 커지면서 K팝의 위상에도 악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 프로그램들을 통해 데뷔한 가수들은 해외 K팝 시장에서도 큰 인기를 얻고 있죠. 그런데 이들이 데뷔한 과정에 의혹이 발생하면서 이들을 선택한 팬들은 물론, 자신이 투표한 가수가 탈락한 시청자 모두 마음 한구석이 찜찜한 상황입니다.

무엇보다 데뷔 조에 들지 못하고 탈락한 가수 지망생들이 입은 상처가 문제라는 지적도 나옵니다. 팬들은 “제작진과 특정 기획사, 즉 어른들의 농간에 꿈 많던 어린 가수 지망생들만 피해를 봤다”고 성토합니다. 실제로 비슷한 오디션 프로그램인 ‘아이돌 학교’에 출연했다가 아쉽게 탈락한 가수 지망생 이해인씨의 아버지는 온라인 커뮤니티와 언론 인터뷰를 통해 “전부터 투표 조작이 의심스러웠지만, 딸에게 불이익이 갈까 봐 문제를 제기하기 어려웠다”며 “(의혹이 사실이라면) 취업 사기나 마찬가지”라고 지적했습니다.

문제를 일으킨 제작진과 기획사 관계자들이 수사를 받는 지금도 가수 연습생들은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 중이겠죠. 앞으로도 이어질 수사를 통해 수많은 의혹이 명백히 밝혀질지, 국민 프로듀서들이 지켜보고 있습니다.

이정은 기자 4tmrw@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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