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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3 EBS수능 점자책 6월에 받아”… 대학 가선 교재 준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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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마이너리티 <39> 시각장애 학생
※ 대부분의 사람은 적어도 한두 가지 측면에서는 소수자입니다. 자신의 불편은 크게 느끼면서도 다른 사람의 소수자성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거나 심지어 냉소적인 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한국일보>는 격주 화요일 한국 사회에서 유독 힘들게 살아가는 소수자들의 모습을 들여다 봅니다.
“시각장애인도 학생입니다. 그런데 고3 시절 EBS수능방송교재를 구하는 일이 가장 힘들었어요. 예를 들면 3월에 나오는 EBS교재는 수능과 70% 연계되는 내용이라 수험생이면 누구나 풀어야 할 필수 교재인데 시각장애인용 점역(점자로 변환) 교재는 6월 모의평가가 있는 6월에 받을 수 있다는 거예요. 초조함이 극에 달해 점역을 담당한 업체에 매일 같이 전화를 해 ‘완성본 형태로 주지 않아도 되니, 점역이 끝난 단원만 바로 보내달라’고 닦달을 해야 했어요.”
서울의 한 사립대에 다니는 시각장애인 김경수(가명ㆍ23)씨는 4년 전에 치른 수능시험의 기억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김씨는 초등학교 1학년 때 망막박리로 실명한 전맹(全盲ㆍ앞이 전혀 보이지 않음) 시각장애인으로, 현재 대학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하고 있다.
시각장애인이 책을 읽고 공부를 하려면 대체도서가 필요하다. 대체도서는 텍스트 파일을 바탕으로 점자도서나 음성도서, 전자도서 등으로 제작한다. 김씨는 “당시 EBS 교재가 시중에 배포된 후 점자책으로 만들다 보니 ‘정안학생’(비시각장애 학생)보다 책을 늦게 받을 수밖에 없었다”며 “이는 시각장애인의 학습권을 존중하지 않은 차별 행위”라고 주장했다.
김씨는 대학에서도 여전히 ‘교재 구하기 전쟁’을 치르고 있다. 맹학교에선 학기마다 준비된 점자 교과서를 나눠줬지만, 대학생이 된 후엔 교재를 스스로 준비해야 한다. 교수마다 일반 서적, 자체 제작 교재, 파워포인트(PPT) 등 교재 활용 방식이 다르고 점역에 시간이 소요될 수 있기 때문에 학기 시작 전 최대한 준비를 마쳐야 한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음성도서 방식을 주로 활용하는 김씨는 “텍스트 파일을 구하면 음성변환이 가능한데, 자체 제작 교재의 경우 교수님이 저작권 등의 이유로 파일을 미리 주는 걸 꺼리는 일도 있다”며 “교수님 결정에 따를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학기 전에 메일을 보내 최대한 이해를 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 시각장애인의 ‘학습할 권리’
교육부에 따르면 특수교육 지원을 받아 유치원과 초ㆍ중ㆍ고교에 재학 중인 시각장애 학생은 올해 기준 전국 1,937명이다. 시각장애 학생 중 심각한 중복장애를 가진 경우를 제외하면, 대체학습자료와 보조공학기기 등의 학습지원과 이동 편의를 제대로 갖추면 학습과 일상생활에 문제가 없다는 게 장애계의 설명이다. 시각장애 학생들 중 고등교육을 원하는 이들이 많기 때문에 대학진학 비율(19.0%ㆍ2017년 장애인실태조사 기준)도 전체장애인(15.1%)에 비해 높은 편이다.
장애인차별금지법(제14조)은 ‘장애인의 교육활동에 불이익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시각장애 학생들은 ‘학습할 권리’를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시각장애인 학생이라면 누구나 부딪히는 난관인 ‘EBS 수능 교재 구하기’ 사례가 대표적이다.
EBS는 교육부 산하 공공기관인 국립특수교육원에 의뢰해 매년 점자와 음성으로 이뤄진 시각장애인용 EBS 수능 대체 자료를 제작 하는데, 교재 발간 시기가 비시각장애인 학생용보다 수개월씩 늦어 김씨와 같은 시각장애 학생 당사자들과 장애인단체에서 수년째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올해는 EBS 대체교재가 제때 발간됐지만, 교재에서 표와 수식이 빠지거나 오탈자가 반복되는 등의 문제가 있어 뒤늦게 수정됐다. 이연주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정책팀장은 “점자도 한글처럼 어문 규정이 있는데 띄어쓰기를 잘못 하거나, 수학 기호가 잘못 적힌 교재로 공부하게 되면 수험생 입장에선 치명적”이라며 “시각장애 학생도 비장애 학생과 같은 출발선에서 달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줘야 하는데 교육당국의 준비가 안일하다”고 비판했다.
◇대학 진학해도 ‘곳곳에 난관’
시각장애 학생들은 대학에 진학한 후에도 여전히 ‘교재 구하기 전쟁’을 치러야 한다. 현재 시각장애 대학생을 위한 대체자료 제작과 공급은 △문화체육관광부가 지원ㆍ운영하는 국립장애인 도서관 △교육부가 지원ㆍ운영하는 대학 내 장애학생지원센터 △민간 시각장애인복지관과 점자도서관 등에서 담당하고 있다. 시각장애 학생 당사자들이 필요에 따라 각 기관에 신청을 의뢰하는 시스템이다. 수도권의 한 대학에 다니는 전맹 시각장애인 박한이(가명ㆍ23)씨는 “국립장애인도서관에 점역을 의뢰하는 학생들이 많다 보니 필요한 교재를 제때 받을 수 없다”며 “학기 시작 전 점역을 의뢰하면 중간고사가 끝날 때 부분 제작된 교재를 받고, 학기가 끝날 무렵에야 전권을 받는 일도 있다”고 말했다.
장애학생의 불편 해소를 위해 대학들도 장애학생지원센터를 통해 지원서비스를 제공하기도 한다. 시청각 중복장애가 있는 김하선(19ㆍ연세대 교육학과)씨는 “학교 지원으로 수업시간에 교수님 강의 내용을 옮겨 적어주는 속기사, 판서 내용을 적어주는 대필도우미와 함께 3인1조로 움직이고 있어 도움을 많이 받고 있다”며 “그래도 청각장애가 있기 때문에 점자가 가장 정확한 정보를 전달 받을 수 있는 수단인데, 간혹 점자 교재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수업을 하면 불안할 때도 있다”고 말했다. 오윤진 세종사이버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장애학생지원센터의 학교별 역량 격차가 크고, 시각장애학생 맞춤 지원을 위한 인력은 부족한 곳이 많다”며 “지방으로 갈수록 인프라가 갖춰지지 않아 장애 학생들의 어려움이 크다”고 설명했다.
편의시설 부족으로 인한 캠퍼스 생활의 장벽도 여전히 높다. 전맹 시각장애인 최민희(가명ㆍ21)씨는 경북지역의 한 사립대에 다니며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있다. 최씨에게 가장 불편한 점은 이동이다. 최씨는 “캠퍼스에 점자블록이 끊어진 곳들이 많아 최대한 외우고 있는 길로만 다니는 편”이라며 “학교에서 시내로 이동하려면 버스 밖에 이동수단이 없는데, 버스정류장 단말기에 음성 지원이 되지 않는 곳도 있어 내가 타야 할 버스가 오고 있는지 매번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물어야 한다”고 말했다.
정보통신기술(ICT) 발달로 키오스크(무인정보단말기) 보급이 빨라지면서 시각장애인들의 불편은 오히려 커지고 있다. 충남지역의 한 대학에 다니는 전맹 시각장애인 이연우(가명ㆍ22)씨는 지난해부터 교내 학생식당의 주문방식이 키오스크로 바뀌면서 거의 이용하지 않고 있다. 이씨는 “식권을 뽑는 키오스크에는 점자나 버튼이 전혀 없고 음성지원도 되지 않기 때문에 누군가 도와주지 않으면 이용이 불가능해 잘 가지 않는다”며 “학교 주변 민간 식당들도 무인단말기를 많이 도입해 혼자 힘으로 혼밥을 할 수 있는 곳이 줄어들어 아쉽다”고 말했다.
◇‘장벽’ 없는 세상 원해요
시각장애 학생들은 공통적으로 장애에 대한 사회적 이해가 여전히 부족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박한이씨는 “시각장애가 있으면 보이지 않을 뿐인데 지능이 낮을 거라고 짐작하는 사람이 많다”며 “음식 메뉴를 정할 때 내게 직접 묻지 않고 주변인에게 묻거나 병원에 가도 ‘아픈 곳이 어디냐’를 내게 질문하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내가 얘기할 수 있다’고 설명해야 하는 일이 씁쓸하다”고 말했다.
장애학생을 ‘자립적 인간’으로 키우는 일보다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 바라보는 국내 장애 교육의 현실에 안타까움을 호소하기도 했다. 박한이씨는 “맹학교에 다니던 시절 한 학생이 컵라면을 끓이다가 물을 쏟아 손이 데어 화상을 입는 사고가 있었는데, 그 이후 학교는 교내 모든 정수기의 뜨거운 물 사용을 금지시켰다”며 “장애가 있다고 해도 결국 비장애인과 어울려 살아가야 하는데 정말로 장애학생을 위한 교육이라면 뜨거운 물 사용을 막는 게 아니라, 뜨거운 물에 데이지 않고 정수기를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줘야 하는 게 아니냐”고 지적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가르는 장벽을 없애야 하는 과제도 여전하다. 김경수씨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어울릴 놀이문화가 한정적이다 보니 비장애 친구들과 공감대를 형성하고 관계를 맺는 데 한계를 느낀다”고 고민을 토로했다. 그러면서 김씨는 미국의 한 대학에 1년간 교환학생을 다녀온 경험을 들려줬다. 그는 “미국 대학에선 장애인 편의시설이 잘 갖춰져 있어서 도서관에서 함께 공부하던 친구들과 체육관도 함께 갔다”며 “친구들이 나를 챙길 필요 없이 체육관에선 각자 운동을 즐기고, 다시 모여 함께 밥을 먹는 등 사교활동이 가능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한국의 대학생활은 다르다. 김씨는 “한국은 장애인 편의시설이 잘 갖춰져 있지 않기 때문에 가령 친구들이 운동하러 갈 땐 ‘경수야 나중에 보자’고 얘기할 수밖에 없고, 이런 일이 반복되니 비장애인과 장애인이 친목을 쌓기 쉽지 않아 ‘벽’이 생기는 것 같다”며 씁쓸하게 웃었다.
끝으로 김씨는 이렇게 강조했다. “시각장애인으로 살아보니 눈이 보이지 않는 자체가 불편한 게 아니에요. 시각을 보완할 대체재는 생각보다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대체재를 적절하게 활용할 수 없게 만드는 환경이 장벽입니다.”
김지현 기자 hyun1620@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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