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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후 6개월부터… 600만원 영어전집… 요람을 흔드는 사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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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출산 시대 유아 사교육비 되레 늘어… 2015년 1조8000억원
月200만원 영어유치원 대기 행렬, 블록놀이도 창의력 학원서
# “책과 교구가 아이의 오감을 다양하게 자극합니다.” 17개월 아들을 키우는 최은영(가명ㆍ33)씨는 아이 100일 무렵 찾은 유아교육박람회에서 이 말에 혹해, 한글전집을 77만8,000원에 구입했다. 그는 “내가 못하는 걸 이 전집이 해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책과 일찍부터 쉽게 친해질 수 있다”는 말도 솔깃했다. 두 달 전부터는 전집 구매자를 대상으로 한 방문 수업도 시작했다. 월 6만5,000원을 추가로 내면 교사가 집으로 와 책이나 교구로 20분 동안 아이와 놀아준다. 아이는 구입 후 한동안 책을 물고 빨기만 했고, 제 값을 하는지도 아직 모르겠지만 후회는 없다. 그는 “가격이 부담이 됐지만 좋다는 이야기를 듣고 안 사는 것도 찜찜했다”고 털어놨다.
# 다섯 살 된 아들을 키우는 정지연(가명ㆍ36)씨는 얼마 전 동네(서울 송파구)에서 유명한 영어학원 유치부(영어유치원)을 보내려고 알아보다 깜짝 놀랐다. 교습비가 월 200만원이 넘는 초고가 학원인데, 들어가겠다고 해도 원아를 ‘가려 받는다’고 해서다. 학원 측은 영재성 시험을 친 후 아이가 5% 안에 들어야 입학을 위한 영어 인터뷰를 볼 자격이 주어진다고 했다. 영재성 시험 응시료만 12만원을 내야 했다. 그는 “영재를 가르치면 가르치는 본인들이 편한 건데, 내가 왜 내 아이의 영재성을 돈 주고 증명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지나치게 상업적이라고 생각해 다른 곳을 알아 봤다”고 말했다.
유아 사교육 시장이 진화를 거듭하며 팽창하고 있다. 출생아 수 감소로 상대적으로 저가인 방문학습지 시장은 고전하고 있지만 영어유치원으로 불리는 영어학원 유치부 등 고가 사교육 시장은 급성장하면서 전체 규모가 계속 늘고 있다. 양정호 성균관대 교육학과 교수는 지난해 초 통계청 가계동향조사(2007~2015)를 분석해 영유아 사교육비 규모를 발표했는데, 2007년 4,034억원에서 8년 만에 1조8,000억원으로 급증했다고 추정했다.
요즘 부모들은 이르면 생후 6개월에 ‘아이의 오감발달을 위해서’ 사교육에 첫 발을 담근다. 보통 고가의 전집 구매로 시작하는 유아 사교육은 점차 그 영역이 넓어진다. 학습을 전면에 내세우는 방식은 옛말. 노래를 따라 부르면서 저절로 언어를 배우고, 블록을 가지고 놀면서 수 개념을 익히기도 한다. 음악, 미술 수업을 통해 아이의 창의성도 길러야 한다. 학원은 ‘들어가기 어려우면 더 들어가고 싶은’ 부모 심리를 자극하기도 한다. 강남의 한 영어유치원 관계자는 지난 18일 등록을 문의하자 “지금 예약해도 가장 빠른 입학 테스트 날짜가 12월 6일”이라고 답했다.
◇”지금이 적기”라는 말에… 불안 마케팅
유아교육업체는 부모와 상담할 때 대개 유아기가 발달에 ‘결정적 시기’라는 점을 강조하며 지금 이 상품을 안 사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를 조성한다. 부모도 이 시기를 놓치면 안 될 것 같은 불안에, 주변 사람들도 다 하는 분위기에 떠밀려 결국 지갑을 열고 만다.
다섯 살 딸 아이를 키우는 이윤희(31)씨도 “유아교육업체에서 ’지금이 적기다’ ‘지금 개월 수야말로 뭐든 흡수할 때다’ ‘가르치는 대로 다 받아들이니 뭐든 해야 한다’는 말에 혹해서 시작한 게 많다”고 했다. 방문미술, 학습지 등 남들 하는 건 웬만큼 다 해 봤다. 얼마 전엔 월 12만원에 단말기를 통한 화상 활용 학습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평소에는 한글, 수학, 영어 등 영상을 시청하면서 아이 혼자 공부하고 월 1회 교사와 10분간 수업을 진행하는 시스템이다. 그는 “동네 엄마들끼리 만나면 주된 대화 주제가 ‘지금 뭘 시켜야 하나’”라며 “아기 개월 수가 높아질수록 불안감이 커지는데 달랑 10분짜리지만 뭐라도 하나 시작하면 안심이 된다”고 말했다.
유아 사교육 중에서도 영어는 유독 고가 상품이 많고, 마케팅도 공격적이다. 강남 영어유치원의 교습비는 월 200만원 수준에 달하고, 영어전집은 300만~700만원을 호가한다.
인천 송도에서 23개월 아이를 키우는 송모(36)씨는 올해 초 교재와 DVD, 단어 카드 등으로 구성된 600만원대 영어전집을 구매했다. 처음에는 말도 안 되는 가격이라고 생각했지만, 상담원의 “전집만 있으면 영어유치원 안 보내도 된다” “초등학교까지 쓸 수 있다” “영미권에 사는 아이처럼 영어가 계속 들리는 환경을 만들어 줘야 한다”는 말에 결국 집에 들였다. 그는 “제가 해외서 살다 오고 영어도 잘해서 분명 전집 하나만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아는데도 사게 되더라”며 “한글전집은 ‘아이가 말을 예쁘게 배울 수 있다’고 해서 구매했다”고 말했다.
◇블록놀이도 학원에서… ‘창의성 사교육’
유아 사교육 시장은 과거 학습지, 영어 중심에서 최근 미술ㆍ음악ㆍ체육, 보드게임, 블록놀이 등 다양한 영역으로 확장되는 추세다. 시대적 흐름에 따라, 부모들도 학습지 보다는 이런 창의성 사교육을 더 선호한다.
경기 부천에 사는 강모(34)씨도 아이가 3세 때부터 3개월에 40만원을 주고 미술교육을 위한 아트센터에 다니고 있다. 주 1회 센터에 방문해 만들기나 그리기, 점토 수업 등을 한다. 그는 “미술 기법을 배우는 게 아니라 창의성을 강조한 미술교육이라는 설명에 끌렸다”며 “예체능 교육으로 아이의 감수성을 잘 발달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입체식 자석, 블록을 만들며 노는 사교육도 있다. 특정 시간 등록한 센터에 모여서 지도 교사와 함께 블록, 자석을 이용해 그날 제시된 주제를 만드는 수업이다. 이들은 학부모에게 ‘놀이를 통한 학습’이라고 홍보하며 보통 주 1회 40~50분에 월 13만~13만5,000원의 수업료를 받는다. 업체의 홈페이지에는 “놀이라는 매체를 통해 어린 아이들에게 기초 수학, 과학의 세계를 열어준다” “수학적 사고력, 표현력, 문제해결 능력을 높여준다”고 홍보하고 있다.
얼핏 보면 이것도 사교육인가 싶지만 놀이를 가장한 학습, ‘가짜 놀이’라는 측면에서 엄연한 사교육이라는 설명이다. 염지숙 건국대 유아교육과 교수는 “지도 교사가 있고, 일정한 시간에, 돈을 주고 한다는 것 자체가 사교육의 틀”이라면서 “만약 지도 교사가 만들 것을 제시했는데 아이가 어려워하는 경우 오히려 스트레스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염 교수는 또 “유아가 정말 하고 싶어서 몰입해서 하는 놀이여야 의미가 있다”고 덧붙였다.
초등학교 1학년, 5학년 두 아이를 키우는 홍보라(37)씨도 유사한 경험이 있다고 했다. 10여년 전 그는 첫 아이를 낳고 얼마 안 돼 300만원 상당의 교구를 구입했다. 돌이 지나면서 이 교구를 활용한 방문수업을 시작했는데, 얼마 안 가 아이의 수업 거부가 심해져 결국 중단했다. 그는 “틀 안에 마름모를 맞춰 넣고 아이에게 ‘마름모라고 따라 해 봐’ 이런 수업을 했는데, 17개월 애가 얼마나 재미없었겠냐”며 “아이 마음에는 관심 없이 엄마의 불안함, 욕심 때문에 가장 비싼 사교육을 하고 있더라”라고 떠올렸다.
◇”아이의 눈높이에서 바라봐야”
사교육이라고 무조건 나쁜건 아니다. 다만 대부분의 유아 사교육이 유아의 수준, 관심, 흥미와는 관계 없이 부모의 불안함을 동력으로, 성인의 판단에 의해 이뤄지고 있는 현실은 문제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김은영 육아정책연구소 저출산ㆍ육아정책실장은 “아이 목소리를 듣지 않고 부모가 보기에 애한테 이게 필요하니까, 이 나이대에는 가베(교구)를 하라고 해서, 불안함에 수백만원의 교구를 사줄 필요는 없다”며 “충분히 놀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아이가 진짜 원하는 게 뭔지 잘 들여다 보라”고 조언했다.
교육시민단체인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의 양신영 선임연구원은 “블록 센터만 보더라도, 부모의 마음을 들여다 보면 ‘즐겁게 놀아라’라는 마음보다는 돈과 시간을 투자한 만큼 ‘블록을 갖고 놀며 창의력이 발달했으면 좋겠다’ ‘수 개념이 발달했으면 좋겠다’ 등 어떤 형태로든 아웃풋을 기대하는 욕망이 자리잡고 있다”고 말했다. 양 선임연구원은 이어 “아이들 수가 급감하면서 유아교육업체의 홍보 전략이 더 자극적으로 되고 있다”며 “사교육을 하더라도 부모가 아이 입장에서 주체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눈을 길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아기 지나친 사교육은 역효과를 낼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선우현 명지대 아동심리치료학과 교수는 “임상 현장에서 보면, 어릴 때 너무 빨리 책을 접한 아이들이 소근육, 대근육을 발달시키지 못하고 또래들과의 상호작용 능력이 결핍된 경우가 있다”며 “이중 언어 환경도 아이의 언어 정체성을 혼란스럽게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선 교수는 “언어는 ‘학습’의 대상이 아니라 상대와 소통하기 위한 도구인 만큼 유아기에는 책이든 교구든 ‘교육’적 관점이 아닌 부모와 아이간 ‘교류’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송옥진 기자 click@hankookilbo.com
조아름 기자 archo1206@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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