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시 대표 “정부가 관리감독 잘했으면” 가습기살균제 참사 책임회피

입력
2019.08.28 17:21
수정
2019.08.28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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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 서울 중구 서울시청에서 열린 '가습기살균제참사 진상규명 청문회'에서 박동석 옥시 RB 대표이사가 청문위원들의 질의에 답하고 있다. 뉴스1
28일 서울 중구 서울시청에서 열린 '가습기살균제참사 진상규명 청문회'에서 박동석 옥시 RB 대표이사가 청문위원들의 질의에 답하고 있다. 뉴스1

가습기살균제 참사 진상규명 청문회에 증인으로 나온 옥시레킷벤키저(옥시RB)와 LG생활건강 임원들이 책임을 회피하는 태도로 일관해 피해자와 가족의 비난을 받았다.

박동석 옥시RB 대표이사는 28일 서울시청 다목적홀에서 열린 사회적참사 특별조사위원회(특조위)의 가습기 살균제 참사 진상규명 청문회에서 진심 어린 사과를 하기는커녕, 정부의 화학물 부실 관리와 SK케미칼 등 다른 기업의 소극적 대응을 지적해 방청객의 야유를 받았다.

그는 “1994년 유공, 지금의 SK케미칼이 가습기살균제를 최초로 개발하고 제조했을 때, 또 1996년 옥시가 유사제품을 세상에 내놓았을 때 정부에서 안전한 기준을 만들고 관리감독을 철저히 했더라면 과연 이런 참사가 났을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2016년 우리 회사가 늦었지만 배상절차에 들어갔을 때 정부기관이나 SK케미칼 등 관련 기업들이 이때라도 진정성 있게 공동으로 배상 노력을 했다면 지금처럼 피해자들이 겪는 고통이 크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사과의 뜻으로 방청객을 향해 고개를 숙인 뒤에도 “옥시 제품의 시장점유율이 약 50% 정도였던 반면, 피해자 구제에 있어서 재정 부담은 85% 이상 감당하고 있다”고 말해 빈축을 사기도 했다. 피해자 지원 대책에 대한 질문에도 “가습기살균제 참사는 다양한 원인과 다수 당사자에 의해, 장기간에 걸쳐 복잡하게 얽힌 문제”라며 “이런 복잡한 문제에서 옥시가 단독으로 해결책을 내놓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답했다

이날 락스만 나라시만 RB그룹 상임이사, 아타 사프달 전 옥시RB 대표이사, 거라브 제인 전 대표이사 등 가습기살균제 참사와 직간접적인 연관이 있는 외국인 임원들은 단 한 명도 증인으로 나오지 않았다. 2010년 5월부터 2년간 국내 옥시 대표를 맡았던 거라브 제인은 유해 제품 판매와 허위 광고에 관여하고, 서울대 측에 독성 실험 결과 조작을 의뢰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특조위는 ‘가습기살균제 참사 가해 기업 가운데 하나인 다국적기업 옥시레킷벤키저 영국 본사가 가습기살균제의 위해성을 알고 있었고 진상 은폐에 관여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의혹을 제기하며 증인으로 나온 박 대표를 추궁했다. 가습기살균제 피해가 처음 알려졌던 2011년 당시 옥시 대표이사를 맡고 있었던 거라브 제인이 가습기살균제의 위해성을 은폐하고 진상을 조작했을 수 있다는 의혹도 제기했다.

최예용 특조위 부위원장은 이와 관련해 2016년 4월 당시 옥시 관계자의 검찰 진술서 일부를 공개했다. 이날 공개된 진술서에 따르면 2011년 10월 4일 제인 당시 대표는 직원들에게 이메일을 보내 “가습기 이슈에 대해 모든 것이 제때 맞춰 이뤄지고, 모든 시나리오를 고려하고 계획하기 위해, 동아시아 지역 변호사인 샬린 림을 한국에 불러오겠다”고 밝혔다.

또 옥시가 같은 해 10월 21일 조모 교수에게 제인 대표 명의로 보낸 자문계약서에선 “우리 제품을 사용한 특정 소비자들에게 발생한 폐질환에 다른 원인 요소가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밝혀야 함”, “(질병관리본부가 발표한 가습기살균제와 소비자들의 폐질환과의 연관관계에 관한)테스트 결과에 대해 비판을 개진할 것”, “우리 제품이 인간건강에 해로울 수도 있다는 주장에 반론을 제기할 작전을 개발하는 데 도움을 줄 것” 등을 명시했다. 제인 전 대표가 진상 은폐를 위해 다양한 노력을 펼쳤다는 근거로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옥시 영국 본사가 가습기살균제의 위해성을 인지한 상태에서 진상을 은폐하려 했다는 정황도 나왔다. 특조위가 공개한 검찰 조서에 따르면 2015년 당시 옥시 직원 조모씨는 검찰에 “대부분 자료를 호주에 있는 글로벌 연구ㆍ개발(R&D)로 보냈다”며 “원료 자료, 처방전, 제조 방법, 원료 및 각 제품에 히스토리가 있으면 준다”고 밝혔다. 이듬해 김모씨는 “2001년 레킷벤키저(RB)를 합병한 후 같은 해 미국 뉴저지에 있는 RB 몬테빌 연구소에서 한국에서 생산ㆍ담당하는 살균ㆍ세정제품에 대해 한국 RB 관계자들이 글로벌 관계자에게 보고를 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또 2016년 5월 옥시 직원 최모씨는 “가습기살균제 문제가 터지자 (중략) R&D 조모 연구소장, 글로벌 세이프티팀 아룬과 제넌, 법무팀 샬린, 김모 변호사가 논의를 했다”며 “글로벌 세이프티팀의 아룬, 제넌이 직접 시험계획서에 사인을 하면서 실행을 진행했고, 최종보고서도 글로벌 세이프티팀으로 바로 보냈다”고 진술했다.

제인 전 대표는 인터폴 적색수배중인 상태이지만 옥시 그룹에서 계속 근무하며 현재 인도에서 아시아, 중동, 아프리카 등을 총괄하는 임원을 맡으며 승승장구하고 있다. 2016년 검찰의 출석요구에 불응했으며 2018년 인도가 우리의 범죄인 인도요청에 거부하면서 계속 관련 수사를 피하고 있다. 이에 박동석 옥시RB 대표이사는 “(제인 전 대표의) 개인 형사사건이라고 보고 있는 입장이어서 영국 본사가 거라브 제인의 출석을 권유하거나 출석하지 않기를 권유하지 않고 있다”고 해명했으나 피해자와 가족들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았다.

옥시RB와 애경산업 제품에 이어 3번째로 많이 팔린 제품인 119가습기살균제를 판매한 LG생활건강은 제품 개발 과정에서 흡입독성 실험을 하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119가습기살균제는 110만 개나 팔렸지만 사건이 공론화된 뒤 5년 만인 2016년 국정조사에서야 이 제품이 가습기살균제 참사와 관련이 있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당시에도 제대로 된 조사가 이뤄지지 않았다.

LG생활건강은 제품을 판매하기 전 독성 실험도 하지 않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치우 전 LG생활건강 생활용품사업부 개발팀 직원은 당시 LG생활건강이 흡입독성 실험을 하지 않았음을 인정하면서 “문헌 검토를 통해 안전하다고 판단한 뒤 제품화했다”고 말했다. 특조위에 따르면 LG생활건강은 2017년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모임에 관련 성분에 대해 독성실험을 했고 안전하다는 내용의 문서를 제출한 바 있다.

최예용 특조위 부위원장은 “(LG건강이 제출한) 해당 자료는 유럽화학물질청에 등록된 경구독성 염화벤잘코늄(BKC) 자료를 근거로 안정성을 평가했다”며 입으로 마시는 경우에 해당하는 경구 독성 자료를 호흡기 흡입 독성 근거 자료로 쓰는 건 옳지 않다고 지적했다.

박헌영 LG생활건강 상무는 가습기살균제에 사태 이후 현재까지도 자사가 생산되는 스프레이 등 호흡기로 흡입이 될 수 있는 제품에 대해 독성 실험을 단 한 차례도 실시하지 않고 있다고 증언했다.

현재까지 LG생활건강의 가습기살균제를 단독 사용해 관련 질환이 생긴 피해자로 공식 집계된 인원은 단 2명뿐이다.

고경석 기자 kav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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