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보

단독

아베 ‘강한 일본’ 야욕에 과거사가 발목… 결국 ‘경제보복’ 무리수

입력
2019.08.06 04:40
수정
2019.08.06 07:50
4면
구독

 [패권 본색 드러낸 日] <중> 아베의 폭주 8년과 그 배후

 2차 집권 후 아베노믹스 전면에… 경기 회복 앞세워 1인 독주 기반 

 이후 집단자위권ㆍ개헌작업 착착… 위안부 강제동원 부인 등 본색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지난달 22일 도쿄 자민당사에서 참의원 선거 결과에 대해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도쿄=AP 연합뉴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지난달 22일 도쿄 자민당사에서 참의원 선거 결과에 대해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도쿄=AP 연합뉴스

2006년 9월 만 52세의 나이로 취임한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는 전쟁을 겪지 않은 전후 세대 첫 일본 총리다. 정책 실행 능력보다 의욕이 앞섰던 1차 내각은 1년 만에 붕괴하는 좌절을 겪었지만 권토중래 끝에 2012년 12월 2차 집권에 성공한 이후로 장기 집권하고 있다.

8년에 걸친 아베 총리의 1ㆍ2차 집권기를 관통하는 것은 ‘전후 체제로부터의 탈각’이다. 패전 후 연합국에 의해 강요된 평화헌법 등 전후 체제에서 벗어나 일본 국민 스스로가 자신감과 자긍심을 가질 수 있는 국가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1차 집권 땐 ‘아름다운 나라’, 2차 집권 이후 ‘강한 일본’으로 지칭되고 있으며, 아베 총리는 이러한 지향점을 향해 집권 8년 동안 멈춤 없이 폭주했다. 한국에 대한 경제보복으로 외양을 드러낸 일본의 패권국가 성향은 이런 일관된 과정을 통해 단단해졌다고 볼 수 있다.

국내적으로 개헌 추진과 애국심 고취를 강조하는 교육개혁 등이, 대외적으로는 미일동맹 강화와 자위대의 해외 파견, 군비 강화 등으로 발현돼 왔다. 이처럼 강한 일본의 실현을 위해선 과거사에 종지부를 찍어야 하는데, 위안부 문제와 강제동원 문제 등 한국과의 역사 갈등이 장애물로 떠오르면서 ‘경제보복’이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다.

 전후 체제 탈각 앞세워 교육기본법 개정 

아베 총리는 2006년 9월 집권 이후 전후 체제로의 탈각을 위해 일본 교육의 근간이었던 ‘교육기본법’ 개정을 추진했다. 패전 이후 1947년 연합군에 의해 제정된 후 첫 손질에 나선 것이다.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도덕 교육을 부활시키면서 개인보다 공동체에 무게를 두었다. 2007년 5월엔 평화헌법 개정의 기초작업으로서 국민투표법을 개정했다. 이전까지 ‘국회에서 개헌안 발의와 처리ㆍ국민투표’라는 규정만 있었는데, 개정을 통해 국민투표 시행과 관련한 구체적인 규정을 만들었다. 이밖에 방위청을 방위성으로 승격하면서 집단자위권 행사를 위한 준비에 차곡차곡 나섰다.

정치 입문 이후 역사수정주의적 성향을 보여온 아베 총리는 집권 직후 주변국과 역사 문제를 둘러싼 갈등을 피했다. 전임자였던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의 잇따른 야스쿠니(靖國)신사 참배로 경색된 한일, 중일관계를 의식한 것이다. 다만 그는 식민지배를 사죄한 1995년 무라야마(村山) 담화를 계승한다는 뜻을 밝히면서도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인정한 1993년 고노(河野) 담화에 대해선 부인하는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이는 2007년 1월 마이크 혼다 민주당 하원의원이 주도한 일본 정부의 사과를 촉구하는 미 의회의 결의안 제출과 통과로 이어지면서 국제사회에서 좌절을 맛보았다.

또 이념 색채가 강한 법안 처리를 앞세우면서 자민당은 물론 야당과 시민사회의 반발을 불렀고, ‘친구 내각’이란 비판을 받았던 측근들의 연이은 스캔들로 아베 1차 집권기는 허무하게 단명했다.

 아베노믹스 앞세워 안정적 권력기반 강화 

아베 총리는 2012년 9월 당시 야당이었던 자민당 총재에 당선됐고, 같은 해 12월 중의원 선거에서 공명당과 연립여당을 구성해 3분의 2 의석을 차지하며 화려하게 재기했다. 1차 집권 시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2차 집권 이후 ‘아베노믹스’를 전면에 내세웠다. 득표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 개헌 등을 내세우기보다 경기 회복과 정치 안정을 앞세워 선거 승리에 올인하는 전략을 취했다. 와신상담하면서 금융ㆍ경제 전문가들과의 교류를 강화한 것이 주효했다.

그러면서 1차 집권 때 중단된 과제들을 실현하기 위해 권력기반 구축에 나섰다. 패권국을 향한 본격적인 질주가 시작된 것이다. 내각 관방(한국의 대통령비서실)에 국가안전보장회의(NSC)와 인사국을 신설, 정보와 인사권으로 관료사회를 장악했다. 내각에는 자신을 지지하는 계파를 배려하는 인사를 통해 2015년 9월 당 총재 선거에선 무투표로 당선될 만큼 ‘아베 1강(强)’ 체제를 만들었다.

개헌과 집단자위권 행사를 위한 움직임도 차근차근 추진했다. 2014년 7월 헌법 해석을 바꿔 집단자위권 행사를 인정하는 각의 결정 이후 “평화헌법을 사문화한다”는 야당과 시민사회 반발에도 2015년 9월 집단자위권 행사를 가능케 한 안보법을 국회에서 통과시켰다.

역사인식에선 1차 집권 때와 달리 본색을 드러냈다. 2013년 12월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했고, 2014년 고노 담화 검증위원회를 만들어 위안부 피해자의 강제동원을 부인했다. 2015년 8월 패전 70주년 담화에선 “전쟁을 일으킨 것에 대한 사죄를 표명해왔다”라며 ‘과거형’ 사죄에 그쳤다. 핵심 메시지는 “미래 세대의 아이들에게 사과라는 숙명을 짊어지게 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었다.

국제사회에 강한 일본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선 역사 문제에 종지부를 찍어야 하는데, 2015년 12월 한일 위안부 합의가 문재인 정부에서 형해화(形骸化)한 데 이어 지난해 대법원 강제동원 배상판결까지 이어지면서 아베 총리는 한국에 대해 경제보복의 칼을 뽑아 들 게 된 것이다.

 아베의 배후로 지목된 ‘일본회의’ 

아베 총리의 역사관 형성과 전후 체제로부터 탈각을 추진하는 데 영향을 주는 배후세력으로 ‘일본회의’라는 우익단체가 주목받고 있다. 아베 정권의 패권국가 지향을 북돋우는 세력으로도 불리는 일본회의는 1997년 5월 우파단체인 ‘일본을 지키는 모임’과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가 통합해 결성된 조직으로, 일본에서 약 4만여명의 회원을 가진 우익 지식인과 기업인 등이 주도하는 단체다. 저널리스트 출신 작가인 아오키 오사무(靑木理)의 저서 ‘일본회의의 정체’에 따르면, 이들의 설립목표에는 △아름다운 전통을 가진 국가 건설 △새로운 시대에 적합한 신헌법 △일본의 감성을 육성하는 교육의 창조 △국가의 안전을 높여 세계평화에 공헌 등 아베 정권이 추진하려는 목표와 유사하다. 또 아베 내각 구성원 중 현재 14명이 일본회의의 활동을 지원하는 ‘일본회의 국회의원 간담회’에 속해 있다.

다만 일본회의가 아베 정권의 정책 결정을 좌우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영향력이 다소 과장돼 있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젊은 우익 정치인이었던 아베 총리가 결성한 ‘젊은 의원의 모임’과 일본회의의 성장 시기가 비슷하고, 전후 체제로부터의 탈각이라는 목표를 향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달려가고 있다는 것이다.

도쿄=김회경 특파원 hermes@hankookilbo.com

댓글 0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