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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계 풍운아’ 정두언, 2016년 낙선 뒤 우울증 고백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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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고시 합격, 서울시 정무부시장, 3선 의원…파란만장 정치 인생 권력과 타협 안 해
16일 숨진 채 발견된 정두언 전 의원은 이명박 정권 개국공신이자 서울 지역구에서 세 번이나 국회의원에 당선된 정치권 중진이었다. 대표적 친이계 의원에서 당내 비주류, 국회의원 선거 낙선까지 파란만장했던 그의 일생을 두고 일각에서는 ‘정치계의 풍운아’로 부르기도 했다.
1957년 3월 6일 서울에서 태어난 정 전 의원은 불우한 가정환경에서도 경기고, 서울대 무역학과를 졸업했다. 서울대 재학 시절에는 ‘Spirit of 1999’라는 록밴드를 결성해 활동할 정도로 노래를 좋아했고, 끼가 넘쳤다.
대학 시절 학업에도 매진해 졸업 전 행정고시에 합격했다. 행정고시에 합격하면 장교로 복무할 수 있던 시절이었지만 정 전 의원은 병사로 자원 입대해 육군 병장으로 만기 전역했다. 대학 졸업 후 그는 행정사무관시보로 임용돼 정무제2장관실에서 근무했다. 당시 노태우 정무2장관을 보좌한 것을 시작으로 20여년간 문화체육부, 국무총리 행정조정실ㆍ비서실 등을 거쳤다.
정계 입문은 2000년이었다. 당시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의 권유로 국무총리실에 사표를 내고 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서울 서대문을 선거구에 출마하면서였다. 그는 낙선했지만 이명박 서울시장 선거캠프에서 일했고, 이명박 시장 밑에서 정무부시장을 역임했다. 2004년 17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결국 당선됐다.
2007년 대선을 앞둔 경선에서 정 전 의원은 친이계 핵심으로 활동했다. 이명박 후보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자 그는 대통령 당선자 보좌역이 됐고, 이명박 정권의 핵심 실세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이 전 대통령의 형인 이상득 전 의원과 그 측근들의 권력 사유화를 비판하다가 권력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18대, 19대 국회의원에 당선되면서 당 싱크탱크인 여의도연구소장을 맡기도 했지만 박근혜 전 대통령에 전면으로 반기를 들면서 정치 인생은 더욱 어려워졌다. 2015년 10월에는 박근혜 정부의 역사 교과서 국정화 문제에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자유민주주의에 역행한다는 이율배반적인 자기 모순”이라고 비판한 것이 대표적이다.
비박 인사가 돼 당시 새누리당 공천조차 불투명했으나 결국 공천을 받아냈다. 하지만 2016년 20대 총선에서는 고배를 마셨다.
낙선 후 정 전 의원은 극심한 우울증으로 자살을 시도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그는 지난해 2월 한국일보 삶도 인터뷰에서 “문제는 (2016년 총선) 낙선 뒤였다. 고통에서 피하려면 죽는 수밖에 없으니 자살을 택한 거야. 14층 건물에 불이 나서 불길에 갇힌 사람이 뛰어 내리는 거나 비슷하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병원을 찾았다. 그냥 있으면 또다시 스스로 해칠 것 같아서. 생각해보면 진짜 나도 살면서 가지가지 한다 싶다”고 밝히기도 했다. (▶관련기사: [삶도 인터뷰] 4선 실패후 삶 접으려던 정두언 “마지막 꿈은 카운슬러”)
20대 총선 이후 사실상 정계에서 은퇴한 정 전 의원은 종편과 라디오 등을 오가며 시사평론가로 활동했다. 그는 3선 의원의 경험을 살려 여당과 야당을 가리지 않고 잘못한 일을 비판했다.
정 전 의원의 페이스북은 올해 2월 10일 다른 사람의 말(내 삶의 원칙은 안 하기)을 인용한 것이 마지막이다. 정 전 의원은 페이스북 문패에 ‘저 사람 괜찮은 정치인이다 라는 말을 들을 수 있도록 끊임없이 정진하겠습니다’라고 적었다.
허정헌 기자 xscop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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