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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도 지역ㆍ계층별 피해 격차 커… “냉방도 이젠 인권”

입력
2019.07.11 04:40
수정
2019.07.16 14:22
9면

[한여름의 연쇄살인, 폭염] 해외 편 <2> 한국 폭염의 확장판, 일본

장마전선의 영향으로 습도가 80%를 오르내리던 지난 4일 오전 도쿄 도시마구의 거리 풍경. 백순도PD
장마전선의 영향으로 습도가 80%를 오르내리던 지난 4일 오전 도쿄 도시마구의 거리 풍경. 백순도PD

“시민 여러분, 생명이 위험합니다. 주의해야 합니다.”

지난해 7월 일본의 TV, 신문, 라디오에선 이런 섬뜩한 경고가 끊이지 않았다. 일본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지진이나 홍수 문제가 아니었다. 폭염 사망자 급증 때문이었다. 2011년 동일본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폭발 사고 이후 쏟아지던 전기 절약 캠페인도 어느 순간 뚝 끊겼다. 오히려 “에어컨을 켜십시오. 전기료 때문에 가동하지 않는다면 심각한 위험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라는 주문이 매일같이 이어졌다. 실제로 지난해 7월 21일 도쿄 이타바시구 아파트에서 70대 남성이 숨진 채 발견됐는데, 방 안의 에어컨은 꺼져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지난 3일 도쿄 도시마구. 이날 도쿄 시내 낮 최고기온은 27.8도였다. 5월부터 낮 최고기온이 30도를 오르내렸지만 이날은 일본 열도에 걸쳐 있는 장마전선 탓에 비가 오락가락하며 더위가 주춤한 상태였다. 하지만 습도가 80%여서 조금만 걸어도 땀이 줄줄 흘러 내렸다. 거리에는 2020년 도쿄올림픽 개최를 알리는 홍보물이 드문드문 걸려 있었다. 일본 미디어에서는 내년 폭염 기간 마라톤 같은 야외종목을 정상적으로 치를 수 있을지 걱정하는 기사가 눈에 띄었다.

일본 사회 전반의 이런 우려는 지난해 열도를 덮쳤던 폭염 피해 때문이다. 도시마구 주택가에서 만난 간베 가요코(56)씨는 “지난 여름 시부모님 모두 온열질환 때문에 고생을 했다”며 “한밤중에 소변을 제대로 가리지 못할 걸 걱정해 물을 자주 마시지 않았다가 위험한 상황에 놓이는 노인들도 주변에 많았다”고 기억했다.

◇한국 폭염의 확장판 일본 2018년 여름

한국ㆍ일본폭염 기록 비교/ 강준구 기자/2019-07-10(한국일보)
한국ㆍ일본폭염 기록 비교/ 강준구 기자/2019-07-10(한국일보)

일본 역사상 최악의 폭염 시즌으로 기억되는 지난해 여름 날씨 기록은 2018년 한국 폭염 ‘확장판’에 가까웠다. 지난해 7월 23일 사이타마현 구마가야시의 낮 최고 기온이 41.1도를 찍으면서 1875년 기상 관측 이래 최고치를 경신했다. 도쿄 역시 40도를 넘나들었다. 지난해 여름 일본 소방청이 집계한 온열질환자 숫자는 한국(4,526명)의 21배가 넘는 9만5,137명에 달했다. 한국보다 온열질환자의 폭을 넓게 잡는 영향도 있지만, 2017년 여름 당시 5만2,984명과 비교해도 2배 가까운 수치였다.

사망자도 160명이나 됐다. 일본에서 가장 많은 폭염 희생자(14명)가 발생한 지역은 혼슈 남부에 위치한 아이치현이었다. 아이치현 중증 온열질환자 숫자는 145명이었다. 반면 수도인 도쿄에서는 264명의 중증 환자가 발생했지만 단 1명도 사망하지 않았다. 서울과 지방의 초고위험군 환자 사망률이 큰 격차를 보였던 지난해 한국 폭염 상황과 유사했다.

지난해 온열질환이 가장 많이 발생한 곳은 집(40.3%ㆍ3만8,366명)이었다. 이어 도로(13.4%), 주차장 등 실외 공중시설(12.8%), 공사장 등 실외 작업장(10.8%) 순이었다. 온열질환자 발생 수치가 장소에 따라 큰 차이가 난다는 것은 기온이라는 획일적인 잣대만으로는 제대로 된 폭염 경고와 대책을 만들 수 없다는 의미라고 일본 전문가들은 입을 모았다. 온열질환 발생 장소가 집안인지, 실외 작업장인지에 따라 각기 다른 환경적 요인이 작용하는 만큼 대비도 달라야 한다는 얘기다. 또 일본의 다양한 지리적 환경 때문에 같은 30도 이상 고온에도 지역마다 사망자 숫자에 차이가 있다는 점도 고려하고 있었다.

2018년 일본 온열질환자 발생 장소/ 강준구 기자/2019-07-10(한국일보)
2018년 일본 온열질환자 발생 장소/ 강준구 기자/2019-07-10(한국일보)

◇일본이 더위지수 활용하는 이유는

일본 정부가 여러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활용하는 방안은 우선 ‘더위지수’(WBGT지수)였다. 더위지수는 1954년 미국에서 열사병 예방 목적으로 처음 고안됐다. 일본은 2008년부터 더위지수를 본격 도입해 사용하고 있다. 인체와 외부 환경의 열 교환에 주목한 지표로, 온도(기온), 습도, 복사열 효과를 고려했다. 더위지수 운영을 총괄하고 있는 일본 환경성은 기온 10%, 습도 70%, 복사열 20%의 가중치를 뒀다. 이시바시 나나오 일본 환경성 환경안전과장은 “습도는 인체가 땀 등을 발산해 외부와 열 균형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습도 가중치가 제일 높다”고 설명했다.

복사열 가중치가 기온보다 높게 설정된 점도 눈에 띈다. 이는 햇볕뿐만 아니라 주변 환경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를 반영하기 위해서다. 복사열은 특정 공간의 적외선 양을 측정해 계산한다. 후생노동성 등에서는 햇볕이 들지 않는 곳의 경우 아예 기온을 배제하고 복사열의 가중치를 30%로 늘려 더위지수를 측정하기도 한다.

측정된 더위지수는 기온과 같은 섭씨(℃)로 표기하고 있었다. 25도 이하일 때는 ‘주의’, 25~28도는 ‘경계’, 28~31도는 ‘엄중경계’, 31도 이상은 ‘위험’ 등 4단계였다. 실질적인 위험을 미치는 엄중경계 이상 기준이 28도로 설정된 것은 과거 다양한 지역의 기상 상황과 온열질환자 발생 간의 상관관계를 분석한 결과다. 28도부터는 실내 온도 상승에도 주의해야 한다는 지적도 덧붙이고 있다.

/그림 4 요코야마 히로시 일본 기상업무지원센터 고문이 지난 4일 오후 일본 환경성 회의실에서 휴대용 더위지수 측정기의 기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도쿄=백순도PD

일본 정부는 2013년부터는 주거지, 주차장, 교차로, 버스정류장 등 생활장소 별 더위지수도 제공하고 있다. 요코야마 히로시 일본 기상업무지원센터 고문은 “다양한 환경에서 측정된 더위지수를 축적한 다음 기상대의 공식 관측 값에서 환산하는 공식도 만들어 활용 중”이라고 말했다.

내년 하계 올림픽이라는 큰 행사를 앞둔 일본 정부는 각종 폭염 대책 마련에 분주한 모습이었다. 휴대용 더위지수 측정기를 노동 현장과 학교 등 다양한 곳에 보급하는 한편 세부적인 매뉴얼을 지속적으로 생산하고 있었다. 이시바시 과장은 “정부의 노력으로 중환자나 사망자를 줄이는 일은 충분히 가능하다”며 “노력하는 만큼 결과가 나오는 일이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에어컨은 생명 유지장치인데…

도쿄 도시마구에서 취약계층 의료지원 활동을 하고 있는 내과의사 니시오카 마코토 박사. 도쿄=백순도 PD
도쿄 도시마구에서 취약계층 의료지원 활동을 하고 있는 내과의사 니시오카 마코토 박사. 도쿄=백순도 PD

한국보다 앞선 폭염 대응책을 갖췄음에도 일본 내에서는 정부의 취약계층 폭염 지원 대책이 부족하다는 목소리가 많았다. 일본 시민사회는 이제 에어컨이 편의시설이 아닌 생명유지장치가 된 상황에서 ‘냉방 인권’의 시각으로 정부가 지원을 늘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폭염 피해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노인 고독사 예방을 위한 지역 커뮤니티 강화 필요성도 제기했다.

도시마구에서 노숙인 등 취약계층 의료 지원 활동을 하고 있는 23년 차 내과의사 니시오카 마코토 박사는 “지난해에는 야외 활동에 내성이 생긴 노숙인보다 오히려 집 안에 있던 독거노인이나 노부부의 온열질환 발병률이 훨씬 높았다”며 “연립주택 같은 빈약한 주거환경에 거주 하는 이들이 대부분 위험군에 속했다”고 말했다.

지난해 일본 정부는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에어컨 설치 비용 일부를 지원하기도 했지만 대상자가 한정됐다는 지적도 나왔다. 저소득층에게 가장 큰 부담인 전기료 인하를 위해 누진제를 완화했던 한국 정부의 정책을 본받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고 했다. 니시오카 박사는 주변 사람과 왕래가 전혀 없었던 70대 남성이 우연히 찾아온 지인에게 발견되면서 천만다행으로 목숨을 건졌던 지난해 폭염 피해 일화를 전하며 “돈이 없는 사람일수록 인간관계도 빈곤해지는 경우가 많아 폭염에 더 큰 위협을 받고 있다”고도 했다.

취약층 지원사업을 주로 하는 시민단체 대표인 이나바 쓰요시 일본 릿쿄대 사회디자인연구학과 교수는 도쿄 네리마구 주택가에서 식당을 운영하며 지역 커뮤니티 거점으로 삼고 있었다. 그는 “다행히 이곳을 찾는 노숙인과 취약계층 주민 50여명은 지난 여름을 무사히 보냈다”며 “일본 전역에 이런 커뮤니티가 활성화될 필요가 있지만 대부분 부족한 민간 기부로 운영돼 정부의 지원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취약계층 주거 지원 활동을 벌이고 있는 일본 시민단체 ‘꿰매기 펀드’가 지역 커뮤니티 활성화를 위해 운영하는 도쿄 네리마구 주택가의 카페. 백순도 PD.
취약계층 주거 지원 활동을 벌이고 있는 일본 시민단체 ‘꿰매기 펀드’가 지역 커뮤니티 활성화를 위해 운영하는 도쿄 네리마구 주택가의 카페. 백순도 PD.

도쿄=조원일 기자 callme11@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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