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훈 칼럼] 거문도 해풍쑥의 출사표

입력
2019.07.05 04:40
29면

1885년, 남하하는 러시아를 저지하기 위해 영국의 함대가 거문도를 기습 점령한다. 그 후 영국 해군은 거문도를 2년간 실질적으로 점령하게 된다. 그런데 당시 영국 해군의 기록을 보면 거문도 점령 직후 식량 확보에 큰 어려움을 겪었던 것으로 보인다. 섬을 아무리 뒤져봐도 가축이 나오지 않았고, 섬사람들과 면담을 해봐도 자신들은 약간의 쌀농사와 해산물을 얻을 수 있는 어업이면 된다는 식이었다. 육류가 없는 이 섬에서 영국 해군은 자신들이 살아남을 수 없을 것임을 직감하고 일본, 중국 등지에서 다양한 가축들을 실어와서 거문도에서 기르는 ‘병참 구축 작전’을 긴급 추진한다.

일단 소, 돼지, 양, 염소, 가금류 등을 거문도로 상륙시키는 것까지는 성공하였으나, 대부분의 가축들은 거문도의 혹독한 자연환경에 버티지 못하고 곧 죽었다. 양은 풀을 뜯다가 해풍이 센 거문도에 자생하던 독특한 풀들에 적응하지 못하고 쓰러졌고, 게다가 대부분의 가금류는 거문도에 자생하던 맹금류에 의해 사냥 당해 전멸한다. 그나마 소는 거문도에서 살아 남았는데, 그 이후에도 타지에서 수송해오던 소들이 거문도의 악명 높은 ‘태풍’에 바다에 빠져 죽는 등, 영국 해군의 거문도에서 살아 남기 위한 눈물겨운 투쟁이 기록에 잘 남아 있다.

세 개의 섬과 부속 도서로 이루어진 면적 12㎢의 작은 섬 거문도는 한반도와 제주도 사이의 망망대해에 위치한 섬이다. 그런 자연 환경이다 보니, 영국 해군의 기록에 남아 있는 것처럼, 거문도 사람들은 어업을 주로 하며 해산물을 주식으로 하는 식문화를 가지고 있다. 지금도 거문도의 밥상은 뭍에서 들여온 쌀과 이 곳에서 잡은 해수산물, 섬에서 나는 간단한 나물류가 주를 이루고, 육(肉)고기가 밥상에 오르는 일은 드물다.

거문도는 먼 바다에 있는 섬이기 때문에 수심이 깊어 다양한 어종이 존재했다. 그래서 거문도는 오랫동안 어업 전진기지의 역할을 하였고, 이 작은 섬에 십수년 전만 하더라도 100척이 넘는 어선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수온의 변화에 따라 어획량이 줄면서 거문도의 어업은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제 거문도에 남아 있는 배는 30척에 불과하다. 거문도의 경제는 끝없는 쇠락의 길로 들어섰을까?

거문도의 경제는 살아나고 있다. 어획량이 다시 증가한 것은 아니다. 놀랍게도 1885년 영국 해군이 들여온 양들이 풀을 뜯다가 적응하지 못하고 쓰러졌을 때 함께 먹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거문도의 강한 해풍을 맞고 자라는 쑥이 거문도의 경제를 견인하고 있다. 흔히들 쑥은 산에서 채취하는 나물이라고 생각하지만 꼭 그렇진 않다. 거문도를 비롯하여 완도, 무안, 강화 등지에서는 쑥을 밭에서 재배하고 있다.

거문도에서는 예로부터 쑥을 산에서 채취하여서 국이나 떡으로 먹거나 뭍으로 넘기는 정도였는데, 35년 전 버려진 바닷가 밭에서 자라고 있던 쑥을 섬주민이 캐서 뭍으로 판 것이 계기가 되어 거문도 내에서 본격적으로 쑥 농사가 시작되었다. 캐기만 하다가 심기 시작한 것이다. 2008년 쑥 재배 면적이 늘면서 쑥 농가들이 자발적으로 ‘거문도 해풍쑥 영농조합’을 결성하게 이른다. 이어 2012년, 해풍을 맞고 자라는 거문도 쑥은 그 지리적 특성과 뛰어난 품질을 인정받아 지리적표시제 농산물로 등록되며 고급 이미지를 획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안타까운 점은 여린 잎이 나는 1~2월에 수확한 쑥을 가락동 도매 시장에 보내고 나면 이후 그 밭에서 다시 올라오는 쑥은 상품성이 없다는 점이었다. 3월 이후 수확한 쑥은 식감이 거칠어 국으로 끓여 먹기에는 적당하지가 않아 판매가 어려웠다.

2014년 거문도 서도리에서 이장을 하던 남주현씨는 가공 기술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지 고민에 빠졌다. 농식품부의 향토산업 육성사업 지원을 받으며 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계획이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향토산업 육성사업은 농촌 지역 특산물이 그 지역의 대표 산업이 되어 그 지역의 경제를 견인하도록 지원하는 농식품부 사업이다. 남주현씨는 3월 이후 수확된 거친 식감의 쑥을 물에 살짝 삶아내서 급속 냉각하면 식감이 부드러지워고 오히려 색과 향은 짙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 냉동쑥 제품을 도매시장으로 보내지 않고 전국의 떡 공장에 쑥 떡의 원료로 공급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길이 열린 것이다. 무엇보다도 거문도 쑥 농가들이 1년에 한번 짓던 쑥농사를 늦여름까지 최대 여섯 번까지 할 수 있게 되었다.

2014년 거문도 전체 쑥 관련 매출은 3억5,000만원에 불과했다. 그러나 2018년에는 30억으로 크게 증가했다. 가공의 힘이다. 이제는 한 발 더 나아가서 해풍쑥 파우더 가공기술을 개발하여 음료, 아이스크림의 원료로 흔히 쓰이는 일본식 말차 파우더를 대체하겠다는 출사표를 던졌다. 맛을 보았더니 짙은 청록색의 뛰어난 색상과 함께 거문도 해풍쑥의 깊은 풍미가 느껴졌다. 그리고 화장품으로도 개발되고 있다. 어업 전진 기지였던 거문도는 해풍쑥의 중심지로 새롭게 태어나고 있다.

문정훈 서울대 농경제사회학부 푸드비즈랩 교수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 Copyright © Hankookilbo

댓글 0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