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명의 이슬람 문명기행] 이슬람 페미니스트들 “코란에도 남녀평등 담겼다”

입력
2019.06.22 04:40
19면

<20ㆍ끝> 이슬람 페미니즘과 베일 착용 문제

대표적 여성 억압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부르카를 착용한 무슬림 여성들. 이슬람 사회는 여성의 권리가 가장 억압된 지역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다른 문화권에 비해 비교적 빨리 페미니즘 운동이 시작된 곳이다. 연합뉴스
대표적 여성 억압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부르카를 착용한 무슬림 여성들. 이슬람 사회는 여성의 권리가 가장 억압된 지역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다른 문화권에 비해 비교적 빨리 페미니즘 운동이 시작된 곳이다. 연합뉴스

이슬람 사회는 다른 문화권에 비해 서구적 근대화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많은 진통을 겪고 있으며 그 속도도 매우 느린 편이다. 특히 무슬림 여성의 경우 결혼, 상속, 이혼, 법정 증언, 의상 착용 등에서 아직도 과거 관습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에 맞서 1980년대 이후 일부 여성 학자들은 가부장주의에 물든 남성 신학자들이 이슬람을 독점해 왔다고 비판하기 시작했다. 흔히 ‘이슬람 페미니즘(Islamic Feminism)’으로 불리는 이들의 사상운동은 여성의 시각에서 코란을 재해석하고 이슬람 전통 내에서 남녀평등을 실현하고자 한다.

◇이슬람 페미니즘, 세속적 페미니즘의 대안

오늘날 이슬람 세계는 여성의 권리가 가장 많이 억압되어 있는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정작 이슬람 세계는 페미니즘 운동이 시작된 시기가 다른 문화권에 비해 비교적 빠른 편이었다. 세계적으로 페미니즘이란 용어는 1880년대 말 프랑스 여성 위베르틴 오클레르가 여성시민(La Citoyenne)이라는 잡지에서 여성의 권리와 해방을 부르짖으며 처음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로부터 30여년이 지나 이집트에서 페미니즘이란 용어가 ‘니사이야(nisaiyya)’라는 아랍어 단어로 번역되어 사용되었다. 20세기 초반 이집트 여성운동을 주도했던 말라크 히프니 나시프는 1910년에 출간한 에세이집 ‘니사이야’에서 여성의 권익을 증진시키기 위해서는 서구적 가치관을 과감히 받아들이고 베일, 결혼, 교육 등의 분야에서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말라크 히프니 나시프가 1910년에 출간한 페미니즘 에세이집 ‘니사이야’
말라크 히프니 나시프가 1910년에 출간한 페미니즘 에세이집 ‘니사이야’

1920년대에 이집트를 비롯한 아랍 국가 전역에서 민족주의 운동이 일어나자 페미니즘도 이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초창기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이 남성과 똑같은 아랍 시민이며 따라서 보편적인 정치, 경제, 사회적 권리를 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주요 관심사는 여성의 정치 참여, 교육 기회의 균등, 경제적 권익 증진 등과 같은 비종교적인 영역에 집중되어 있었고, 이 같은 점에서 서구 페미니즘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1970년대 이후 이란, 수단 등과 같은 국가에서 이슬람 정권이 등장하고 이슬람주의에 입각한 종교ㆍ정치 단체가 이슬람 세계 전역에서 세력을 확장하자 기존의 페미니즘 운동은 심각한 위기를 맞이했다. 이슬람주의자들이 보기에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종교, 인종, 성별에 관계없이 동등한 권리를 부여해야 한다는 페미니즘의 주장은 이슬람의 전통으로부터 한참 벗어난 것이었다. 그 결과 이슬람주의자들은 페미니스트들에게 ‘서구적 문화에 오염된 탈선자’ ‘세속적 가치를 추구하는 자’ ‘반(反)이슬람주의자’라는 비난을 쏟아부었다.

1980년대부터 일부 무슬림 여성학자들은 보수 이슬람주의자의 비판에 맞서기 위해 이슬람적 가치에 토대를 둔 새로운 경향의 페미니즘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이슬람 여성학자 아미나 와두드, 파키스탄 출신의 미국인 여성학자 아스마 바를라스, 모로코의 여성 사회학자 파티마 메르니시 등으로 대표되는 이슬람 페미니즘은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여성과 남성의 평등을 추구한다는 목적에 있어서 기존의 세속적 페미니즘과 궤를 같이했다. 그러나 이슬람 페미니즘은 그것을 실현하는 방법에 있어서 종교적 역할에 주목하고, 이슬람 전통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여성의 권리를 확보하려고 시도했다는 점에서 커다란 차이를 보였다.

◇가부장주의적 코란 해석을 해체하다

이슬람 페미니즘 운동가들은 페미니즘이 추구하는 가치가 이슬람의 전통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첫 단추로 코란과 같은 종교 텍스트를 여성의 입장에서 재해석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보기에, 코란에는 남녀평등을 명확하게 언급하는 다수의 구절이 있으며, 예언자 무함마드를 비롯한 초기 이슬람 공동체 지도자들 역시 여성의 권리 증진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오늘날 이슬람 사회에서 여성에 대한 차별이 만연해진 이유는 보수적인 남성 신학자들이 임의대로 코란을 해석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슬람 페미니스트들은 남성 학자들에 의해 주도된 가부장적 해석을 해체함으로써 코란 속에서 남녀평등 사상을 재발견할 수 있다고 설파했다.

미국의 이슬람 페미니즘 학자 아미나 와두드. 2008년 영국에서 그녀는 남성 무슬림 신도 앞에서 예배를 이끄는 이맘 역할을 하여 세계적인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AP 연합뉴스
미국의 이슬람 페미니즘 학자 아미나 와두드. 2008년 영국에서 그녀는 남성 무슬림 신도 앞에서 예배를 이끄는 이맘 역할을 하여 세계적인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AP 연합뉴스

이슬람 페미니스트들은 많은 사람의 편견이나 오해와 달리 코란은 근본적으로 남녀평등의 원리를 담고 있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증거로 다음과 같은 코란 4장 1절을 인용한다. “오 사람들이여, 하나의 영혼으로부터 너희를 창조하시고 그것으로부터 그 짝을 창조하시며 또한 그 둘로부터 많은 남자와 여자를 번성시킨 너희의 주님을 경외하라.” 미국의 이슬람 페미니즘 학자인 아미나 와두드는 코란에서 남녀는 하나의 영혼으로부터 동시에 창조되었다고만 언급되었을 뿐 여성이 남성의 갈비뼈로부터 창조되었다는 식의 이야기는 전혀 없다고 지적한다. 다시 말해, 코란의 창조 이야기는 남녀를 불문하고 모든 인간을 그 기원에 있어서 동등하게 취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슬람 페미니스트들은 무엇보다도 코란의 원의를 올바로 읽고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코란 자체와 코란에 대한 해석을 구분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여성 차별과 억압의 문제가 발생하는 근원은 코란이 아니라 보수신학자에 의한 잘못된 가부장적 해석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를 쉽게 떨쳐내지 못하는 이유는 오랜 세월 동안 보수 신학자의 해석과 주석이 비판 없이 절대적 권위를 누려 왔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파키스탄 출신의 이슬람 페미니스트인 아스마 바를라스는 “알라가 말한 것(코란)과 우리가 알라의 말씀이라고 이해한 것(주석)은 신학적 차원에서 구분된다”고 말하며, 코란과 주석서를 혼돈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그녀는 아무리 유명한 신학자의 주석서라도 우리가 그 권위에 눌려 맹목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이유가 없다고 역설한다.

◇베일 착용에 대한 전향적인 인식

오늘날 외부인들이 이슬람 사회에서의 여성 억압을 논할 때 가장 많이 거론되는 주제 가운데 하나가 베일 착용 문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슬람 사회 내부에서도 베일 착용 문제는 근대 이후부터 오랫동안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다. 특히 터키는 유럽식 근대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아예 법으로 베일 착용을 금지하기도 했다. 또한 모로코, 레바논, 튀니지 등과 같이 비교적 개방된 이슬람 국가에서는 개인이 자유롭게 베일을 착용할지 여부를 결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직도 상당수의 무슬림 여성들은 베일 벗기를 주저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코란에 베일을 착용하라는 내용을 담은 구절이 있고 무슬림으로서 이를 거부하는 것이 심리적으로 큰 부담이 되기 때문이다.

파키스탄 출신의 이슬람 페미니즘 학자 아스마 바를라스(왼쪽)와 저서 'Believing Women in Islam'. 그는 “코란은 남녀평등의 시각에서 읽히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SAQI BOOKS 제공
파키스탄 출신의 이슬람 페미니즘 학자 아스마 바를라스(왼쪽)와 저서 'Believing Women in Islam'. 그는 “코란은 남녀평등의 시각에서 읽히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SAQI BOOKS 제공

이슬람 페미니스트들은 베일 착용 문제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갖고 있을까? 이들은 베일을 쓸 것을 언급하고 있는 코란 구절 역시 보수적인 남성 학자에 의해 그 원의가 곡해되었다고 비판한다. 보수 신학자들은 여성의 베일 착용 의무를 강조할 때 “예언자여 그대의 아내들과 딸들 그리고 믿는 여성들에게 몸에 외투를 걸치라고 말하라. 그렇게 함이 가장 편리함이라. 이로써 그녀들은 구분되어 희롱당하지 않을 수 있다”라는 코란 구절을 자주 인용한다. 이와 관련하여 이슬람 페미니스트인 아스마 바를라스는 이 구절의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계시와 관련된 시대적 상황과 계시가 추구하는 목적을 올바로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바를라스의 견해에 따르면, 코란이 계시된 7세기 무렵 아랍 사회에서 베일과 같은 형태의 긴 외투는 신분이 높은 여성만 입을 수 있는 의상이었다. 그리고 이슬람은 초창기 시절 메카에서 박해를 받는 상태였고, 그로 인해 무슬림 여성이 공공장소에서 희롱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잦았다. 바를라스는 이 같은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상기 계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여성을 성적 희롱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보호하라는 것이다. 높은 신분의 귀부인처럼 베일이나 외투를 착용한다면 함부로 무슬림 여성을 희롱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슬람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보자면, 보수적 남성 신학자들은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한 셈이다. 핵심은 여성에 대한 보호이며 베일을 착용하는 것은 이를 실현하기 위한 방편적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은 자구에만 집착하여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무조건 베일을 착용하라고 강요하는 시대착오적인 해석의 우를 범해 온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오늘날 무슬림 여성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복지를 증진시키고 경제적 자립을 도울 수 있는 보호 장치를 마련하는 것일 듯싶다.

김정명 명지대 아랍지역학과 교수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 Copyright © Hankookilbo

댓글 0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