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명의 이슬람 문명기행] 무함마드는 평범한 인간, 게다가 문맹이었다

입력
2019.06.08 04:40
19면

 <18>형상화가 금지된 문맹 예언자와 이슬람 예술 표현 양식 

  ※이슬람 국가 모로코에서 이슬람 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김정명 명지대 교수가 우리가 잘못 알고 있거나 모르고 있는 이슬람 문명에 대한 이야기를 매주 토요일 <한국일보>에서 들려드립니다. 

2015년 이란에서 제작된 ‘알라의 사도 무함마드’ 포스터. 갓난아기인 무함마드의 얼굴이 빛으로 가려져 있다.
2015년 이란에서 제작된 ‘알라의 사도 무함마드’ 포스터. 갓난아기인 무함마드의 얼굴이 빛으로 가려져 있다.

이슬람의 경전 코란은 예언자 무함마드가 유일신 알라로부터 받은 계시를 모아 그가 사망한지 20여년 후인 7세기 중반에 편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오늘날 18억명에 달하는 무슬림 가운데 무함마드의 얼굴이나 용모를 정확히 아는 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이슬람에서는 전통적으로 무함마드의 모습을 그림이나 조각을 통해 형상화하는 것을 금기시 해왔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무슬림들은 무함마드가 글을 읽고 쓸 줄 몰랐던 문맹이었다고 주장한다. 무함마드를 신격화시켜도 모자를 판에 왜 무슬림들은 그에 대한 형상화를 금하고 한사코 문맹이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을까?

 ◇아브라함의 신앙 회복을 외치며 코란을 계시 받다 

이슬람은 유대교, 그리스도교와 더불어 중동 지역을 대표하는 종교다. 이 세 종교는 세부적인 교리와 실천 사항에서 차이가 있지만, 유일신 사상, 무(無)로부터의 창조 개념, 천국과 지옥을 중심으로 한 내세관 등에서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특히 경전 코란에는 성서에서 언급된 아담, 노아, 아브라함, 이삭, 요셉, 요나, 엘리사 등을 예언자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이 가운데 아브라함을 무함마드의 이상적인 선구자로 보았다. 흔히 서양 종교학자들은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을 ‘아브라함의 종교’라고 통칭하는데, 그 이유는 유대교나 그리스도교와 마찬가지로 이슬람 역시 아브라함을 신앙의 모범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구약성서에 따르면 아브라함은 아내였던 사라를 통해 이삭을, 여종이었던 하갈을 통해 이스마일을 아들로 두었다. 두 여인은 이삭과 이스마일 가운데 누가 아브라함의 권리를 계승하느냐의 문제를 놓고 극심한 갈등을 겪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는 이슬람의 전승과 코란에도 등장한다. 이슬람의 기록에 따르면, 아브라함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갈과 이스마일을 데리고 팔레스타인을 떠나 아라비아 반도의 메카로 오게 되었다.

코란에 따르면, 어느 날 아브라함은 신의 계시를 받고 아들 이스마일과 함께 메카에 돌을 쌓아 작은 신전을 세우게 되었다. 이 신전이 바로 오늘날 전 세계 무슬림들의 정신적 구심점이자 순례의 목적지인 카으바신전이다. 무슬림들은 카으바 신전이 원래는 아브라함이 믿었던 유일신을 모시기 위한 장소였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그 유일신을 아랍어로 알라(Allah)라고 부르고 있다.

메카의 카으바 신전. 무슬림들은 아브라함이 이 신전을 세웠다고 믿는다. islamlaws.com제공
메카의 카으바 신전. 무슬림들은 아브라함이 이 신전을 세웠다고 믿는다. islamlaws.com제공

무슬림들은 이스마일의 자손이 메카에서 번창했으며 오랜 세월이 지나 기원 후 570년경에 이르러 무함마드가 태어났다고 말한다. 하지만 무함마드가 태어났을 때 메카의 모습은 과거와 크게 달라져 있었다. 아브라함이 믿었던 유일신 신앙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우상숭배가 판을 치고 있었다. 무함마드가 태어났을 무렵 카으바 신전의 주변에는 약 360개의 우상이 세워졌다고 전해진다. 무함마드는 40세의 나이가 되었던 610년에 알라로부터 처음 계시를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632년 사망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계시를 받으며 우상 숭배를 타파하고 땅에 떨어진 도덕과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아브라함의 순수 신앙으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코란의 신성화와 문맹 예언자 무함마드 

이슬람의 경전 코란의 등장 과정 역시 유대교, 그리스도교와 밀접한 연관성을 갖고 있다. 이슬람의 교리에 따르면, 유일신 알라는 인류의 각 민족에게 계시를 내렸으며, 이 가운데 일부는 경전의 형태로 기록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코란에는 무함마드 이전에 아브라함이 계시 문서를, 모세가 율법서를, 다윗이 시편을, 예수가 복음서를 각각 계시받았다고 전해진다. 이슬람의 관점에서 보자면, 코란은 구약과 신약의 계시 전통을 잇는 제3의 경전이 되는 셈이다.

이 같은 계시의 역사관은 7세기 초 새롭게 등장한 신흥 종교로서 이슬람이 중동 지역에서 그리스도교나 유대교에 버금가는 지위를 신속히 확보하는데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코란이 처음부터 그 권위를 순순히 인정받은 것은 아니었다. 무함마드가 생존했던 당시 아라비아 반도에서는 코란의 말씀이 정말로 알라의 계시를 받아 적은 것인지 여부를 따지는 논쟁이 자주 벌어졌고, 일부는 코란이 무함마드 자신의 창작물이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16세기 페르시아에서 제작된 세밀화. 무함마드의 얼굴이 흰색 천으로 가려져 있다. 런던 도서관 소장
16세기 페르시아에서 제작된 세밀화. 무함마드의 얼굴이 흰색 천으로 가려져 있다. 런던 도서관 소장

이에 대해 무슬림 신학자들은 코란이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문학 작품이 아니라 알라의 말씀이 왜곡 없이 그대로 문자로 옮겨져 만들어진 신성한 경전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증거로서 무함마드가 문맹이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견해에 따르면, 코란은 그 어떤 시인이나 작가도 단 한 구절조차 흉내 낼 수 없을 정도로 가장 아름답고 완벽한 문체로 저술된 문학 작품이다. 더구나 코란은 법률, 도덕, 역사, 철학, 과학 등 각 분야에 걸쳐 방대한 지식을 담고 있기도 하다. 읽거나 쓰지 못하는 문맹에 불과했던 무함마드는 보통의 책도 쓰지 못했을 터인데 하물며 코란처럼 위대한 작품을 창작하여 쓰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 했다는 것이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일부 서구학자들은 무함마드가 실제로 문맹이었는지에 대해 의심을 제기하기도 했다. 그들의 견해에 따르면, 무함마드는 예언자가 되기 전에 대규모의 무역 상단(商團)을 꾸렸던 상인이었고 따라서 대단한 학식의 소유자는 아니었다 할지라도 기초적인 읽고 쓰기 능력을 갖추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대부분의 무슬림들은 무함마드의 문맹설을 따르고 있다.

물론 무슬림들은 무함마드가 문맹이었다 할지라도 여전히 존경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오직 그가 코란을 전달한 예언자이기 때문이지 그가 신성한 존재 자체이기 때문은 아니다. 이슬람의 교리에서 무함마드는 평범한 인간의 능력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그는 병든 자를 치유하거나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을 행하지 않으며 인간의 죄를 사해주지도 않는다. 인간이 구원을 얻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코란에 적힌 알라의 계율을 믿고 실천하는 것뿐이다. 그는 철저하게 지극히 평범한 인간적 면모만 강조될 뿐이며, 심지어 읽고 쓰는 것조차 하지 못하는 문맹이기도 하다. 이슬람 교리에 따르면, 만일 무함마드를 신성한 존재로 숭상한다면 이 또한 일종의 우상숭배의 죄를 범하는 것에 해당한다.

 ◇이슬람 고유의 예술적 표현 양식 발전 

무함마드를 오직 평범한 인간으로만 보는 교리는 독특한 이슬람 예술 표현 양식 발전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데, 그 중 하나가 무함마드의 얼굴과 용모를 그림이나 조각상을 통해 표현하는 것을 일절 금하는 것이다. 무함마드의 모습을 담은 그림이나 조각상이 만들어질 경우 자칫 그가 신격화되거나 우상으로서 숭배의 대상이 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아랍 세계에서는 무함마드의 형상화가 금지되자 그의 이름을 쓴 캘리그래피가 발전했다. sacred-lines.com제공
아랍 세계에서는 무함마드의 형상화가 금지되자 그의 이름을 쓴 캘리그래피가 발전했다. sacred-lines.com제공

무함마드에 대한 형상화 금지가 어떤 방식으로 지켜졌는지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달랐다. 아랍 지역에서는 형상화 금지가 아주 엄격하게 지켜졌고, 그 결과 대체 표현 수단으로 서예가 선택되었다. 다시 말해 무함마드의 모습을 직접 그리지 못한 대신 아랍 글자로 무함마드란 이름자를 멋들어지게 쓰는 캘리그래피 예술이 발전한 것이다. 페르시아나 터키 지역에서는 무함마드의 형상화가 제한적으로 허용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가 세밀화다. 세밀화는 주로 책에서 사용되는 삽화를 가리키는데, 페르시아와 터키에서 제작된 세밀화에는 무함마드의 모습이 종종 나타난다. 하지만 세밀화에서도 금지의 원칙은 일관되게 지켜졌다. 세밀화를 자세히 보면 무함마드를 그리되 얼굴만은 빛이나 흰색 천으로 슬쩍 가리는 우회적 기법이 사용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1971년에 제작된 아랍영화 ‘메시지’ 포스터. 영화 속에서 무함마드의 모습은 일절 등장하지 않는다.
1971년에 제작된 아랍영화 ‘메시지’ 포스터. 영화 속에서 무함마드의 모습은 일절 등장하지 않는다.

무함마드에 대한 형상화 금지는 오늘날 제작되고 있는 무함마드 관련 영화에서도 고스란히 지켜지고 있다. 예를 들어, 시리아 영화감독 무스타파 아카드가 1971년에 만든 아랍 영화 ‘메시지(The Message)’는 무함마드의 생애를 다룬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얼굴은 처음부터 끝까지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무함마드가 등장하는 장면은 그가 1인칭 시점에서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는 기법으로 처리했다. 2015년 이란에서 마지드 마지디 감독이 연출한 ‘알라의 사도 무함마드(Muhammad, The Messenger of God)’는 무함마드의 뒷모습을 실루엣으로 보여주되 얼굴은 빛으로 가리는 방식을 택했다. 이에 대해 일부 보수적인 수니파 아랍 신학자들은 이것마저도 형상화 금지 원칙을 어긴 것이라며 격분을 토로하기도 했다. 무함마드의 모습을 어떻게 표현하느냐는 아직도 이슬람 세계 내에서 민감한 논쟁거리다.

김정명 명지대 아랍지역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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