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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기의 100년에서 100년으로] ‘채식주의자’ 한강, 나무불꽃으로 자유와 해방을 갈망하다

입력
2019.04.15 04:40
28면

 

 <58> 한강의 ‘채식주의자’ 

 ※‘김호기의 100년에서 100년으로’는 지난 한 세기 우리나라 대표 지성과 사상을 통해 한국사회의 미래를 생각하는 <한국일보> 연재입니다. 매주 월요일 찾아옵니다. 다음주에는 이승만의 ‘독립정신’이 소개됩니다.

지난 2016년 6월 소설가 한강이 서울 마포구 한 카페에서 열린 맨부커상(Man Booker Prize)수상 기념 및 신작 '흰' 발간 기자 간담회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지난 2016년 6월 소설가 한강이 서울 마포구 한 카페에서 열린 맨부커상(Man Booker Prize)수상 기념 및 신작 '흰' 발간 기자 간담회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87년 6월 항쟁으로 열린 민주화 시대를 지켜본 것은 내 나이 20대 후반이었다. 30대 후반에는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불어 닥친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목격하게 됐다. 사회는 고정돼 있지 않다. 역동적으로 변화한다. 더욱이 현대란 사회학자 막스 베버가 말했듯 ‘서로 다른 가치들이 우리 삶을 지배하고 영원한 투쟁을 벌이는 시대’다.

이런 사회 변화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게 예술이다. 사회학적 시각에서 보면, 예술은 사회를 반영한다. 동시에 그 사회의 새로운 방향 모색을 다른 이들에게 타전(打電)한다. 그렇다면, 21세기에 들어와 20년이 가까운 현재, 우리 사회는 어디에 서 있고 어디로 가는 걸까. 예술은 이에 대해 어떤 인식과 통찰을 안겨주는 걸까.

우리 사회의 현재를 파악할 수 있는 유용한 개념이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다. 일찍이 독일 철학자 에른스트 불로흐가 주조했고, 우리나라 정치학자 임혁백이 재구성한 개념틀이다. 전통의 시간이 완전히 퇴장하지 않은 상태에서 산업화·민주화·세계화의 시간이 혼돈스럽게 공존하는 현실에 대한 예술적 반응 가운데 단연 내 시선을 끌었던 것이 작가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2007년)다.

한강은 이 기획에서 살펴보는 지식인들 가운데 가장 젊다. 산업화 시대에 태어났고, 민주화 시대에 젊은 시절을 보냈으며, 세계화 시대에 본격적인 활동을 펼쳤다. 그는 우리 현대 지성사의 새로운 세대다. 이 기획에서 다뤘던 작가 박완서가 분단 문제를, 작가 조세희가 노동 문제를 주목했다면, 한강은 민주화와 세계화가 중첩된 한국적 ‘후기 현대사회’ 문제에 시선을 고정시킨다. 우리 사회의 선 자리와 갈 길에 그는 탁월한 문학적 성취를 보여준다.

 

 ◇한강의 삶과 문학 

3대 세계문학상으로 꼽히는 맨부커상 수상작 발표를 앞두고 2016년 5월 15일 런던에서 최종 후보에 오른 소설가 한강이 ‘채식주의자’ 책을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3대 세계문학상으로 꼽히는 맨부커상 수상작 발표를 앞두고 2016년 5월 15일 런던에서 최종 후보에 오른 소설가 한강이 ‘채식주의자’ 책을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한강은 1970년 광주에서 태어났다. 연세대에서 국문학을 공부했고, 1993년 ‘문학과 사회’에 시가, 199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이 당선돼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그는 2016년 ‘The Vegetarian(채식주의자)’으로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수상함으로써 일약 유명해졌다. 하지만 그는 이미 한국소설문학상, 오늘의 젊은예술가상, 이상문학상, 만해문학상, 황순원문학상을 수상한 역량 있는 작가로 평가돼 왔다.

그 동안 한강은 소설집 ‘여수의 사랑’ ‘내 여자의 열매’ ‘노랑무늬영원’, 장편소설 ‘검은 사슴’ ‘그대의 차가운 손’ ‘바람이 분다, 가라’ ‘희랍어 시간’ ‘소년이 온다’ ‘흰’ 등을 발표했다.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를, 산문집 ‘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 등을 내놓기도 했다.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채식주의자’는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의 단편소설로 이뤄진 연작 소설이자 장편소설이다.

2017년 10월 한강은 미국 뉴욕타임스에 한반도 평화에 관한 글을 기고해 관심을 모았다. ‘미국이 전쟁을 언급할 때 한국은 몸서리친다’는 제목의 글에서 그는 당시 전쟁의 가능성이 고조된 상황에서 평화가 아닌 어떤 해결책도 의미가 없음을 강조했다. 또 다른 대리전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이 지금, 여기 한반도에 살고 있음을 환기시킴으로써 한반도 평화에 대한 국민들의 염원을 대변했다.

앞서 말했듯 한강은 영어로 옮겨진 ‘채식주의자’로 세계 3대 문학상의 하나로 일컬어지는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수상했다. ‘채식주의자’는 뉴욕타임스의 ‘2016년 최고의 책 10권’ 가운데 하나로 선정되기도 했다. 서구사회에 적잖이 알려진 작가인 만큼 그의 용기 있고 시의적절한 발언은 국내외에서 작지 않은 주목을 받았다. 이처럼 그는 지식인으로서의 작가에 부여된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소설가이기도 했다.

 ◇우리 사회의 선 자리와 갈 길 

지난 2016년 5월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독자들이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을 수상한 한강 작가의 소설 ‘채식주의자’를 살펴보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지난 2016년 5월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독자들이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을 수상한 한강 작가의 소설 ‘채식주의자’를 살펴보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사회학을 공부하는 내가 한강의 작품 세계를 말하기는 쉽지 않다. 예술과 사회의 관계를 탐구하는 예술사회학의 시각에서 볼 때, 그의 문학 세계는 폭력적 규율을 재생산하는 우리 시대에 대한 비판적 반성과 성찰적 모색을 촉구하는 것으로 보인다. ‘채식주의자’는 그의 이러한 문학의식을 선명히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그가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뭘까.

“어리석고 캄캄했던 어느 날에, 버스를 기다리다 무심코 가로수 밑동에 손을 짚은 적이 있다. 축축한 나무껍질의 감촉이 차가운 불처럼 손바닥을 태웠다. 가슴이 얼음처럼, 수 없는 금을 그으며 갈라졌다. 살아 있는 것과 살아 있는 것이 만났다는 것을, 이제 손을 떼고 더 걸어가야 한다는 것을, 어떻게도 그 순간 부인할 길이 없었다.”

‘채식주의자’ 말미에 놓인 ‘작가의 말’이다. ‘수없이 갈라지는 가슴’ ‘살아 있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가 ‘채식주의자’의 내용을 이룬다. 한강은 ‘차가운 불’을 느꼈던 그 어느 날을 ‘어리석고 캄캄했다’고 말한다. 어리석고 캄캄한 것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한 그 차가운 불꽃은 무엇이었을까.

‘채식주의자’를 읽을 수 있는 코드들은 에코페미니즘 시각을 포함해 여럿일 수 있다. 내가 주목하려는 것은 사회학적 시각이다. 이 연작은 육식을 거부하고 나무가 되길 꿈꾸는, 영혜라는 이름을 가진 한 여성의 삶을 다룬다. 영혜의 삶을 바라보는 시선은 다층적이다. ‘채식주의자’가 남편을 화자로, ‘몽고반점’이 형부를 화자로 해 이야기를 풀어간다면, ‘나무 불꽃’은 언니가 화자가 돼 들려준다.

“너무 많은 고기를 먹었어. 그 목숨들이 고스란히 그 자리에 걸려 있는 거야. (중략) 한번만, 단 한번만 크게 소리치고 싶어. 캄캄한 창밖으로 달려 나가고 싶어, 그러면 이 덩어리가 몸 밖으로 뛰쳐나갈까. 그럴 수 있을까. 아무도 날 도울 수 없어. 아무도 날 살릴 수 없어. 아무도 날 숨 쉬게 할 수 없어.”

영혜의 독백이다. 여기서 육식은 존재의 사회적 조건을 은유한다. 육식의 대척에 놓인 나무는 존재의 실존적 소망을 은유한다. 사회학적 시각에서 볼 때, 육식이 폭력과 규율로 무장된 가부장 사회이자 후기현대 사회를 상징한다면, 나무는 그 폭력과 규율에 맞서 존재가 갈구하는 평화와 해방의 세계를 함의한다.

‘채식주의자’는 국내외에서 극찬을 받았다. ‘채식주의자’가 우리 현대 지성사에 기여한 바는 두 가지다. 첫째, 한강은 우리 사회를 규정짓는 가부장적 폭력과 후기현대적 규율을 문학이라는 형식을 통해 조명함으로써 현재의 비판적 반성을 보여준다. 둘째, 그 폭력적 규율이 실존적 존재에게 안긴 상처들을 나무를 꿈꾸는 식물적 상상력을 통해 치유하려는 미래의 성찰적 모색을 추구한다. 한강은 이 기획에서 다뤘던 최인훈, 박경리, 박완서, 조세희의 문학 세계를 넘어 우리 사회가 새로운 시대에 들어서고 있음을 증거하는 작가라고 나는 생각한다.

 ◇예술의 미래 

소설가 한강의 작품들. ‘채식주의자’와 518 민주항쟁을 다룬 소설 ‘소년이 온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소설가 한강의 작품들. ‘채식주의자’와 518 민주항쟁을 다룬 소설 ‘소년이 온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인간은 생각과 느낌을 동시에 갖는 존재이고, 이를 문학·음악·미술 등으로 표현한 게 예술이다. 그 느낌과 생각을 다채롭고 생생하게 엿볼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예술은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이해하는 데 훌륭한 통로다. 인간에 대한 구체적이고 보편적인 인식이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는 데 중요한 조건이라면, 문학을 위시한 예술은 이런 인간에 대한 이해와 의미 있는 삶의 추구에 기여한다.

“꿈속에선, 꿈이 전부인 것 같잖아. 하지만 깨고 나면 그게 전부가 아니란 걸 알지...... 그러니까, 언젠가 우리가 깨어나면, 그때는...... (중략) 조용히, 그녀는 숨을 들이마신다. 활활 타오르는 도로변의 나무들을, 무수한 짐승들처럼 몸을 일으켜 일렁이는 초록빛의 불꽃들을 쏘아본다. 대답을 기다리듯, 아니, 무엇인가에 항의하듯 그녀의 눈길은 어둡고 끈질기다.”

연작 ‘채식주의자’의 마지막 작품인 ‘나무 불꽃’의 마지막 부분이다. 가부장적 폭력과 후기현대적 규율의 구속에서 벗어나 자신을 응시하고, 초록빛 불꽃같은 자유와 해방의 새로운 삶을 꿈꾸는 것은 누구에게나 당연한 권리다. 폭력과 규율에서 자유와 해방으로 가기 위해선 개인적이든 집단적이든 자각과 항의라는 연옥을 통과해야 한다. 한강이 전하려는 메시지는 아마도 이것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00년 전 우리 사회는 국가적 차원에서 민족 해방의 민주공화국을 꿈꿨다. 이 소망은 3ㆍ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으로 나타났다. 100년이 지난 현재, 이제 우리 사회는 개인적 차원에서 자유와 평등의 민주공화국을 꿈꿔야 한다. 우리 예술은, 한강의 문학에서 볼 수 있듯, ‘실존적 민주공화국’을 향한 상상력의 모험을 더욱 활기차게 추구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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