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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프리 계약’의 족쇄… 정규직 차씨, 과로사하자 프리랜서가 됐다

입력
2019.04.24 04:40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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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 개발 정규직 계약서엔 최저임금으로 남은 임금은 프리랜서 계약 꼼수 

 공공기관이 추진하는 프로젝트 ‘정규직 채용 규정’ 무용지물로 

[저작권 한국일보]신동준 기자
[저작권 한국일보]신동준 기자

차세대 프로젝트 현장에서 목격되는 정보통신기술(IT) 노동자들의 열악한 현실은 이들이 맺는 불합리한 계약형태와 관계가 밀접하다. 심할 경우 10차까지 이어진다는 끝없는 하도급 계약의 족쇄, ‘반은 정직원, 반은 프리랜서’라는 신분에 놓이게 하는 기형적인 반(半)프리 계약 등이 원흉이다.

 ◇상위 하청업체와 계약했다고 월급 체불 

한국정보통신산업노동조합(이하 IT노조) 관계자는 “IT 기업에는 대체로 노조가 없고, 프로젝트별로 타사 소속 기술자가 동료로 묶이면서 다른 분야보다 부당한 환경에서 일하는 경우가 많다”고 밝혔다. 이 때문에 유일한 전국단위 IT업계 노조인 IT노조에는 어느 하나 쉽게 해결할 수 없는 구조적 문제를 배경으로 하는 안타까운 사연들이 끝없이 답지한다.

최근 ‘10차’까지 내려가기도 한다는 금융계 차세대 프로젝트 하도급 계약 관계는 고질적인 문제다. 입사 후 계약서 작성이 보편적인 데다, 업계 표준계약서가 존재하지 않는 약점을 이용한 불공정 계약서가 판을 친다. 계약서가 공정하지 않으니 인력파견업체 눈 밖에 나면 월급 떼이는 게 다반사이다. 6차 하도급 업체 소속으로 카드사 차세대 프로젝트에 투입됐던 프리랜서 개발자 A씨는 기존 업체와 계약종료 후 한 단계 위인 5차 하도급사와 계약을 했다가 눈 밖에 나 월급을 못 받았다. 기존 업체와의 계약이 끝났지만 프로젝트 기간은 남은 상황. A씨를 눈여겨본 5차 하도급 업체가 ‘우리와 계약하고 프로젝트를 계속하자’고 제안해 수락했다가 사달이 난 것이다.

IT노조 정연아 조직국장은 “하도급이 한 단계라도 줄어들면 월급이 늘어나니 계약을 한 것인데, 6차 업체에서 자기네와 계약하지 않았다고 괘씸하다며 남은 월급을 주지 않은 것”이라고 말했다. “프리랜서는 용역계약서를 쓰기 때문에 월급 못 받으면 민사소송 해야 하는데, 누가 월급 받겠다고 번거로운 소송을 걸겠어요. 저희한테 연락한 사람이 A씨의 팀장이었어요. 그런데 이 팀장도 프리랜서고, 하도 방법이 없어 심지어 고객사인 카드사가 이 하도급 업체에 압박을 넣었는데도 해결이 안돼 결국 A씨는 월급을 못 받았어요.”

2016년 3월 사망한 프리랜서 웹디자이너 장원향(35)씨는 무려 일곱 번째 하도급 업체 소속이었다. 국내 모 종합금융사 차세대 프로젝트에 프리랜서 디자이너로 투입됐던 장씨는 새벽에 호텔 비상계단에서 실족사했다. 유족은 장씨가 일명 IT보도방이라 불리는 인력파견업체 임원과 계약 연장을 논의하려 술을 마셨고, 만취한 그를 성폭행하려는 임원이 강제로 인근 호텔 객실로 옮겼다고 파악했다. 임원이 자리를 비운 사이 성폭행을 피하려고 객실을 탈출한 장씨가 실족해 추락했다는 게 유족의 주장이다. 사실이라면, 하도급 계약의 압박이 최종적으로 장씨의 죽음을 유발한 셈이다.

지난해 12월 산업은행에서 사망한 개발자 차모씨가 쓴 '반프리'계약서. 산업은행 프로젝트 수주 사 중 하나인 SK C&C의 협력업체 대원씨앤씨와 최저임금 수준인 연봉 1,920만원에 작성한 근로계약서(위)와 계약기간 변동 가능성을 명시한 위임계약서라는 이름의 프리랜서 계약서(아래). IT노조 제공
지난해 12월 산업은행에서 사망한 개발자 차모씨가 쓴 '반프리'계약서. 산업은행 프로젝트 수주 사 중 하나인 SK C&C의 협력업체 대원씨앤씨와 최저임금 수준인 연봉 1,920만원에 작성한 근로계약서(위)와 계약기간 변동 가능성을 명시한 위임계약서라는 이름의 프리랜서 계약서(아래). IT노조 제공

 ◇서류상 ‘정규직’, 사망하자 ‘나 몰라라’ 

하도급 계약 문제를 막기 위해 공공기관 프로젝트의 경우에는 프로젝트에 투입되는 인원의 일정 비율 이상을 정규직으로 채용하도록 규정하지만, 이마저도 계약서를 두 개 작성하는 ‘반프리’ 계약을 맺으며 무용지물이 된 지 오래다.

지난해 12월 서울 여의도 산업은행 화장실에서 숨진 차모씨는 2017년 9월 프로젝트에 투입됐다가 1년 3개월 만에 사망했다. 차씨는 프리랜서이면서 동시에 하청업체 소속인, 일명 ‘반프리’ 개발자였다. 반프리 계약은 급여를 직원 급여와 개인사업자 앞 매출로 나누어 지급하는 형태로, 반프리 계약을 맺는 노동자는 회사 소속 정규직 근로계약서에는 최저임금을 받는 거로 작성하고, 나머지 임금은 프리랜서 계약을 통해 지급하는 이중계약서를 쓴다.

차씨는 산업은행 프로젝트 수주 사 중 하나인 SK C&C의 협력업체 대원씨앤씨와 연봉 1,920만원(월 160만원) 근로계약서를 작성했고, 동시에 위임계약서라는 이름의 프리랜서 계약서를 따로 작성했다. 국가 및 공공기관과의 소프트웨어 외주 계약에서는 하도급 비중을 50% 이하로 제한해야 하는(소프트웨어산업 진흥법 제20조의3) 조항을 우회하기 위해서다. 소프트웨어정책연구소(SPRi) ‘국내 SW프리랜서 개발자 현황과 정책 시사점’ 보고서에도 반프리 계약이 업체에 유연한 방식으로 정규직 인력을 확보해주고 프리랜서 계약을 통해 4대보험 부담을 줄여줘 업계의 관행으로 존재한다고 지적돼 있다. IT노조는 “프리랜서용 위임계약서는 원청회사의 요구대로 계약 기간을 변경할 수 있어 노동자에게 불리하다”며 “하도급 업체는 반프리 계약을 통해 규정을 지키면서 적법한 4대 보험 납입을 편법으로 낮춘다”고 지적했다.

반프리 계약 탓에 서류상 ‘정규직’인 차씨는 사망과 함께 다시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프리랜서’가 됐다. 그의 죽음에 대해 발주사와 하도급 업체 모두 소관이 아니라며 해명을 떠넘긴 것이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차씨의 죽음에 대한 문제제기가 이뤄지자 산업은행은 고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제출한 사망경위서에서 ‘반프리를 포함한 고용형태는 확인이 불가하다’고 밝혔다. 고 의원실이 하도급측인 SK C&C에 차씨의 임금대장을 요구했으나 ‘유족 동의 없이 고인의 서류를 제출할 수 없다’는 의견이 돌아왔다.

 ◇수많은 부작용… ‘차세대’ 집착 해야 하나 

각종 문제가 지적됨에도 금융기관들이 앞다퉈 진행하는 무리한 대형 차세대 프로젝트들은 얼마나 효율적일까. 많은 관계자가 이 지점에서 고개를 가로 젓는다. “처음부터 설 혹은 추석 연휴로 새 시스템 오픈 일자를 정해놓고 시작하는데 제대로 될 리가 있냐”는 거다. 대표적인 예가 지난해 우리은행 차세대 전산시스템 '위니(WINI)'의 전산장애 사례다. SK C&C가 주 사업자였던 우리은행 차세대 시스템은 다양한 경로의 비대면 금융채널을 고객이 손쉽게 이용할 수 있는 인프라를 구축할 계획으로 3,000억원을 투자한 대규모 사업이었다. 애초 계획은 2018년 2월 설 연휴에 맞춰 가동이 시작될 예정이었으나, 우리은행은 3개월가량 연기했다. 하지만 5월 8일 ‘위니’ 가동 첫날부터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이 실행되지 않는 등 전산장애가 속출했다. 지난해 8월 전국은행연합회 조사에 따르면 우리은행에 제기된 지난해 2분기 전산시스템 교체에 따른 민원은 623건에 달했다.

수백, 수천 명의 인력과 2년에 가까운 시간이 투입되는 고객 맞춤형 차세대 프로젝트를 빈번하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 제기는 업계 전반에서 이뤄지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IT기업 관계자는 “기존 패키지 소프트웨어를 사용해도 충분한데 차세대 프로젝트를 추진한다. 기성양복을 사서 수선해 입어도 될 걸 매번 맞춤 양복을 사는 꼴이다”고 목청을 높였다.

차세대 프로젝트를 발주하는 '갑'이 바뀌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업계를 막론하고 IT관련 업무가 핵심이 된 시대에 필요 역량을 회사가 내재화하지 않고 외주업체에 맡겨 버림으로써 판단과 책임을 피하고 있는 방식이 문제의 근본원인이라는 것이다.

10여년간 개발업무를 해 온 인터넷 서비스 업체 대표 김모씨는 “아직도 많은 은행이 내부에 전산 개발팀을 두지 않는다”라며 “발주업체가 이 지경이어서 하도급 업체들의 인력 착취 등이 반복해 벌어진다”고 지적했다.

박소영기자 sosyou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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